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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 가능성/신승철
동보연 2009-06-12 23:50:51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 가능성

- 피터싱어와 칸트주의자와의 논쟁지점을 중심으로

목차
들어가며 : 피터싱어의 공리주의적 동물권의 반격
1. 공리주의에 대한 칸트주의 의무론적 비판
2. 피터싱어의 생명 공리주의의 논리구도
3 ‘선험성’에 입각한 동물권의 재구성
4. 동물 계몽주의와 야생동물
5. 물자체와 산업동물
7.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반려동물의 유정성
6. 칸트의 실천이성과 실험동물과 동물윤리
나오며 : 칸트주의적 동물권의 재구성을 위하여

들어가며 : 피터싱어의 공리주의적 동물권의 반격

피터싱어는 『동물해방』이라는 책에서 인간과 동물의 구획 속에서 논의되던 철학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서, 인간중심주의를 기각한다. 그가 제시한 패러다임은 인간 이외의 동물을 포괄하는 새로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사회를 디자인하고, 윤리를 정초하는 것에 있다.

그가 생각한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존의 공리에서 ‘다수’라는 개념은 생명체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그는 공리주의를 생명체 공영주의로 확장하면서, 논의를 진행하는데, 그가 생각한 추론의 형태는 여성과 흑인이라는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되었던 귀류법을 적용한다.

즉, 여성 선거권 반대주의자들이 여성에게 권리를 주는 것은 동물에게 권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증이라면서, 그것이 그 논증이 건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을 사례로 든다.

즉, 여성에게 권리를 줄 수 있는 사회가 구성될 정도면 아마도 동물에게도 권리를 줄 것이라는 역 추론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해방과 동물권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성, 아이, 유색인 등의 소수자들의 권리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 된다.

피터싱어가 공리주의의 원리를 변조하면서, 생명권 공영주의로 만들어낼 때, 사람들은 이 공리주의의 추론이 갖고 있는 정교한 논증양식에 대해서 공감을 취했다. 특히 채식주의자와 동물보호론자들은 동물권에 대한 논증양식 중에서 가장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행위의 동기보다도 행위의 결과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공리주의를 오히려 행위의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 의식이 없는 동물을 사고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로 본 피터 싱어의 윤리적 사고양식은 매우 정교한 논쟁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윈 좌파의 진화론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유인원이라는 경계가 있었다는 식으로 인간과 동물의 매개를 부활시켜 그것을 인식론적으로 단절시키지 않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이러한 반격 앞에서 칸트적인 생명권의 논의가 가능한가라는 것은 여전히 의문지점으로 남아 있다. 칸트가 물자체에 대해서 판단정지를 하고 인간이 감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현상계라는 인식주관 내에서만 사고해야 한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했을 때, 그것은 이미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의 틀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방법론이 동물과의 소통의 형태와 동물을 사고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 즉, 유인원의 해부의 열쇠조차도 보다 발전된 인간에게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의 원리를 역으로 적용하여, 보다 발전된 인간이라는 결과의 해부를 통해 원숭이를 분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칸트주의적 인간론의 인식의 틀을 해부의 열쇠로 사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인간과 그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는 인식의 틀을 제시한 칸트라기보다는 동물적 본성으로서의 인간을 해부하고 있는 칸트를 사고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인원 계획에 동참한 칸트를 발견하고, 그의 철저한 인간중심주의가 오히려 가장 동물적인 인간을 복원할 수 있는 인간 내부의 동물적 사유양식을 분석하는 칸트를 재발견하고자 한다.

1. 공리주의에 대한 칸트주의 의무론적 비판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중심으로 사고하면서, 행위결과 중심으로 사고하는 편향을 갖는다. 공리주의와 달리 칸트의 의무론은 선행을 사회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이 어떤 동기를 갖고 있느냐의 여부가 더 중요하다. 칸트의 의무론은 선의지와 공통감이라는 두 가지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는 공동체에서 선행의 동기적 의미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지평을 인간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생명에게 확장한다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가? 다시 말해서 계몽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의무론적 지평을 아이, 동물, 식물, 로봇에게 확장한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이 논쟁이 수반하게 될 매우 중요한 문제는 의무와 동시에 권리도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생명권에 대한 언급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이 문제는 동물권과 로봇권, 아동권에 대한 논쟁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칸트가 선의지를 갖고 있는 인식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설정을 했을 때 의무론적 지평은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지만, 그러한 인식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생명체에게 그것을 강요할 때는 폭력적이고, 지식 권력적이며, 훈육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동물과 아이에게 훈육적인 시스템을 통해서 인식능력 없는 주체에게도 의무를 강요해 왔다. 가축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산업동물은 훈육의 시스템 속에서 칸트의 의무론의 인간 외부적 투사를 받았고, 아이들은 교육과 훈육을 통해서 의무에 대한 규칙을 습득해 왔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의무론과 같은 칸트의 도덕철학은 권리에 대한 인정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동물들이 실수로 인간을 죽였을 때,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도 그들의 의무에 수반되는 권리는 주장된 적이 없다.

동물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갖고 있는 인식능력테제가 작동하고 있는 선험적 지평을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칸트의 의무론이 이러한 선험적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한정된다면 인간은 자연대상인 동물에게 훈육을 해서는 안 되며, 야생성을 보존하며, 자연 그대로 피드백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을 훈육하고 그들을 길들였으며, 동물로부터 많은 의무의 족쇄를 채웠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칸트가 인식주관을 통해서 알 수 없는 물자체의 영역이라고 자연대상물을 간주한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물자체의 영역에 대해서 인간중심주의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종별화(종차별주의)가 하나의 의무론적 지평의 의미를 갖고 작동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면은 동물과 인간이 공진화하면서 함께 진화해온 역사가 갖는 이면에서 벌어진 하나의 폭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의무론은 선험적 인식능력을 가진 인간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로 종별화되는 순간, 아이나 동물에게도 강요되는 훈육과 계몽의 명제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핵심적인 의무론의 확장이라는 범주적 오류를 저질렀고, 결국 인간이라는 선험적 인식능력을 갖고 있는 주체 외부의 물자체에게도 이러한 의무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왜 동물은 길들여져야 하는가? 왜 동물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해 줄 의무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은 칸트주의적 동물의무론이 이미 실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의식을 가진 인간은 말 못하는 동물에게 하나의 의무를 부과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선험적인 인식능력이 없기 때문에 권리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역으로 동물의무론으로 확장되고 있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동물권이나 생명권은 더 적극적으로 배치되는 이율배반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인식의 범주는 매우 흔들리게 된다.

실재로는 의무를 갖고 있는 동물도 반드시 권리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동물선험성은 ‘야성성’을 의미할 것이며, 동물후험성은 ‘길들이다’라는 행위를 의미할 것이다.

동물선험성이라는 측면은 주어를 형성할 것이며, 그것은 인식능력과 다른 지평에서 하나의 행위능력의 선험성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동물권은 이 행위능력의 주어가 보존되어야 할 적극적인 하나의 테제가 될 것이다.

2. 피터싱어의 생명 공리주의의 논리구도

피터싱어는 『동물해방』에서 동물의 권리를 공리주의 입장에서 논증하면서, 동물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생명윤리를 구성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논증의 절차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훈육과 폭력을 떠받들고 있는 동물의무론에 입각한 인간중심주의를 내파하지 않고, 비껴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피터싱어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여부라는 ‘유정성’의 태제를 통해서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성적 주체로서 등장시킨다.

이 유정성이라는 테제만 비추어 봐도 인간이 동물에게 저지르고 있는 사육, 도살, 사냥, 동물실험 등은 폭력의 극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피터싱어의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생명체가 모두 행복해야 할 공리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타 생명체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타 생명체에게 폭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피터싱어는 채식주의를 권장한다.

물론 ‘우리들이 먹고 있는 동물들도 고통을 느낀다’는 명제에 대해서 인식능력을 갖추지 못한 동물들에게 고통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반문을 한다면, 매우 인식론적인 문제로 다시 파고드는 경향이 될 것이다.

피터싱어에 의해서 감성적 영역에서의 다루어지고 있는 이 유정성의 의미는 실지로는 극소태제로서 제안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유정성은 ‘고통을 느낀다’라는 수동적인 반응의 의미로서 한정될 것이 아니라 ‘정을 느끼며 피드백 할 수 있다’라는 적극적인 의사소통적 능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반려동물의 대부분이 갖고 있는 유정성은 바로 이 정을 느끼고 피드백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한 고통의 여부만으로 한정할 수 없는 보다 확장된 선험적 능력이 동물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유정성의 의미는 동물들이 갖고 있는 의사소통행위능력으로 볼 수 있으며, 정이라는 차원이 단순한 감성적 차원을 넘어서 식별 불가능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의사소통의 능력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성의 능력을 제외한 나머지의 영역에서 동물이성은 유정성의 의사소통의 능력을 의미하고, 동물감성은 야성성의 자연과의 피드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은 동물도 고통을 느낄 줄 안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동물의 학대적 현실을 고발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동물의 유정성을 너무도 고통의 여부로 한정해서 사고하다보니 마치 동물에게는 어떤 소통의 능력조차도 없는 수동적인 주체인 것으로 사고되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을 느끼고 주고받는 능력을 갖고 있는 동물의 유정성은 하나의 동물이 갖고 있는 의사소통의 이성능력으로까지 확장시켜 사고할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행위와 마음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행위자체가 하나의 마음을 의미한다는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에서의 핵심적인 테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자연생태 속에서 형성되는 마음의 문제는 자연의 동역학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자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의 마음의 문제는 동물의 행위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며, 반려동물의 귀여운 행위는 동물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선험성’에 입각한 동물권의 재구성

선험적 인식능력의 테제는 아무래도 ‘지능’과 같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능과 같은 문제에서는 아이나 정신장애인, 식물인간, 동물에 대한 차별은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동물에 있어 선험성의 문제에서 유정성은 매우 중요한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이 의사소통의 행위능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수긍한다면, 문제는 어떤 성격의 의사소통일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지, 그러한 선험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부차적인 것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정을 느끼고, 피드백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다양한 형태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물들의 의사소통은 형태, 중복, 패턴이 문제일 뿐이지, 매우 자연스럽게 의사전달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단어와 개념을 사용한 의사소통만을 다루는 것은 아이와 같은 상태의 의사소통의 문제를 도외시한 특수한 의사소통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정성은 동물선험성이라는 개념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상학적 지위를 갖는 선험적 행위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지능IQ이라는 차원의 문제가 선험적 인식능력이라면 칸트주의는 매우 희화화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선험성의 차원은 행태 공명적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며, 의사소통을 성공시킬 수 있는 형태 공명적 행위능력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든다’는 단순한 사실은 ‘반가워하는구나’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며, 그것은 우리의 감성적 인식을 공명시키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의사소통에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능력을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동물의 경우에 그것의 권리를 말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의 권리는 의사소통적 주체로서 동물이 선험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권리적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동물에게서 의사소통의 선험적 능력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정을 느낄 수 없는 냉혈한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인간도 정이라는 감성을 통해서 피드백하고 느끼고 교감하는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조차도 인간의 동물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통각적 능력조차도 사실 동물적 직관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초감각적 의식이기보다는 형태, 중복, 패턴에 따른 감성적 인식일 뿐이다.

여기서 동물 선험성이 결과적으로 동물권을 옹호하는 의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동물들이 후험성의 술어적 의미의 ‘길들이다’라는 행위로서 피드백 되기보다는 선험적인 ‘정을 느낀다’라는 능력의 작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동물계몽주의적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동물의 의사소통의 능력을 갖고 있는 정을 피드백할 수 있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권리적 주체로서 간주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물선험성 테제는 매우 중요한 생명윤리적 함의를 갖고 있다. 정을 느끼며, 자연과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선험적으로 하나의 권리의 주체로서 간주될 수 있는 선험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경우에는 형태공명의 동역학적 패턴을 범주적으로 분석하고, 인식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오성의 능력이 있지만, 이것조차도 인터렉션적인 자연과의 상호작용이라는 기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동물의 유정성은 매우 고도로 발전된 의사소통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상징적 코드화작용이 존재하며, 오래된 무리간의 의사소통의 내용이 유전적으로나 행동 역학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그렇다고 동물의 의미를 선천적인 본성의 차원으로만 사고하려는 편향은 동물의 피드백의 발전과정과 공진화를 하나의 코드 속으로 가두려는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4. 동물 계몽주의와 야생동물

동물 계몽주의는 인류에 있어서 지속되었던 동물에 대한 가축화의 시도로 이어졌다. 그것은 야생동물의 야성성을 빼앗고 인간의 수단과 목적에 복속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물 계몽주의는 훈육과 조련을 수반하며, 목적합리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야생동물이 갖고 있는 야성성은 자연환경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생성된 성질이었으며, 그것을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든 환경 속에서 길들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야생동물에 대한 동물 계몽주의는 가축과 반려동물로 나타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은 인류가 살아온 수 만년 동안은 이 반려동물과 함께 진화를 해왔다는 사실이다.

반려동물 혹은 애완동물들은 인간과 함께 진화하면서, 자연환경보다는 인간과의 피드백에 더 가깝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 계몽주의의 완성은 반려동물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제외한 가축이라고 불리는 농장동물의 경우에는 반려동물과 달리 식용을 위해서 길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동물 계몽주의에 있어서 오히려 배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 계몽주의의 입장은 단순히 인간을 위해서 길들인다는 차원을 넘어서 분류하고 차별적으로 매개와 배제를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반려동물의 경우에는 인간과의 감정을 소통하는 차원에서 매개되었다면, 농장동물은 식용을 목적으로 감정의 소통을 극도로 자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의 입장에서는 반려동물과 농장(산업)동물과의 차이점은 매우 미비하다고 할 수 있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의 경우에 인간이라는 전제조건에 대해서 이 동물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되는 패턴을 갖게 된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고려하는 반려동물의 선험적 감성을 고려한다면, 반려동물의 식용화의 문제 즉 개식용의 문제는 매우 잘못된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즉, 반려동물은 동물 계몽주의의 오래된 반복적인 교육에 의해서 습관화되고 선험성까지 획득한 소통능력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육곰 문제에서 보이듯이 가축화를 시도하면서 야성성을 빼앗으려는 정책은 매우 동물 계몽주의의 입장에서 반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동물 계몽주의를 배제하면서 목적합리성에 적합한 동물을 취사선택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성성이라는 동물의 특성은 인간에게 괄호치고 사고된 자연환경의 지평을 보여주는 근본생태주의의 급진성만큼이나 매우 급진적인 동물의 지평을 보여준다.

여기서 야성성의 동물은 한 마리의 늑대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늑대와 같은 무리를 보여주며, 이 무리라는 집단은 자연환경에 맞서기 위해서 군집의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야성성의 지평에서는 동물 계몽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으며, 반문명적인 흐름과 강렬함, 무리간의 소통, 협력이라는 조건, 집단적인 무의식의 거대한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야성성은 개가 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늑대의 지평을 그것도 여러 마리의 늑대의 지평을 드러내 보이며, 인간과의 소통을 통한 선험성이 아니라, 자신의 종과의 소통을 통한 선험성이라는 동물 선험성의 새로운 극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육곰을 가축화하려는 시도와 이율배반적으로 반달가슴곰 야생화 프로젝트가 이루어지는 문제에서 당국이 봉착하는 것은 야성적인 동물 선험성을 복원하기가 참 힘들다는 문제다. 인간과의 피드백이 익숙한 동물들은 자신의 무리와의 피드백을 복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동물 선험성이라는 차원은 후험적으로 취득된 인간과의 피드백이라는 이차적 선험성과 분리되게 된다. 그러나 이 이차적 선험성조차도 인간을 전제조건으로 했을 때 선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개는 인간과 더불어 수 만년을 같이 공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5. 물자체와 산업동물

우리는 소고기를 먹으면서, 그 소가 어떻게 길러졌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돼지들이 생활이 얼마나 열악한 밧데리 케이지 속에서 비육되었으며, 햇볕도 건초도 없는 아주 비좁은 공간에 몸을 뉘이고 있는 동물들의 고통의 숨소리를 알지 못한다.

칸트는 인식대상을 물자체라고 보면서, 물자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해 버렸다. 자연대상은 알 수 없으며, 그러나 이율배반적으로 인식의 틀에 인식내용을 준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동물을 알지 못하지만, 고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엄연히 살아있는 생명체를 물자체로 간주한 것은 격리의 공간, 폐쇄의 공간이라는 공장식 축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동물과 인간을 격리하고, 동물이 어떻게 길러지며 생활하는 지에 대해서 인간이 알 수 없게 되는 것은 이미 칸트적인 물자체로서의 완결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산업동물이 생명체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소들이 광우병에 걸리는 중요한 이유는 도축된 소의 뼈를 갈아 다시 소에게 먹이는 동물성 사료에 있음을 최근에서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연대상을 물자체로만 사고하면서도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매우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칸트의 이율배반은 다음과 같은 생명에 대한 오류추리를 통해서 드러난다.

“인간은 동물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동물을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동물이 열악한 상황에 처하면 인간도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인간에게 존재하는 야성성에 대해서 유정성에 대해서 솔직하지 않게 얘기한다면, 즉 인간 내면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동물성에 대해서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생명의 오류추리는 사회 시스템으로 고착된다.

사람들이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고기의 원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 원료가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면, 이 격리의 공간과 배제와 매개의 비변증법적인 작용이 만들어낼 오류추리의 극단은 유전자조작을 통한 더 많은 고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키메라와 같은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미 생명공학은 물자체로서의 동물에 대한 조작적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권리를 갖는 생명이라는 생각을 배제한 채, 오류추리를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상황은 역전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폐쇄된 공간인 공장식 축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외부와 격리된 연구실에서 무슨 연구가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없는 상황으로 치달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연과 동물의 영역이 오히려 열린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고 과학과 지식으로 무장한 인간집단이 물자체로 돌변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에게 있어서 물자체는 연구실의 지옥 같은 환경일 것이며, 그곳에서 숱하게 실려 나오는 시체와 암 덩어리가 붙은 동물사체일 것이다.

또 동물이나 자연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어떤 약물이 주사되어 있는 지 알 수 없는 고기들을 생산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도살장과 축사가 바로 물자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에게 있어서의 물자체는 바로 인간의 비밀스러운 조작적 행위자체라고 할 수 있다.

7.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반려동물의 유정성

칸트에게 있어 존재했던 인식론적 전환의 문제는 바로 인식대상 차원에서 인식주관 차원의 문제로의 전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려동물에 대한 기존의 사고는 인식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동물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제 반려동물을 인식주관의 문제로 전환하는 인식론적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정성이 고통을 느끼는가의 여부라는 수동적 감성양식이 아니라,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동적 감성양식이라면, 반려동물은 이제 단순히 대상물로만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권리적 주체인 동물로 인식론적 전환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삶의 변화를 촉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의 의미는 동물에게 권리를 준다는 급진적인 인식의 변화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동물이 단순히 인간의 삶의 보족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의사소통을 하면서 공동체의 구성원의 일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인간의 이기에 의해서 길들여졌다가, 다치거나 병들면 버려지는 상황이다. 수많은 길고양이들과 유기견들은 그들이 실제로는 가족구성원으로 존재했다가 인간의 무책임성에 의해서 버려져서 길바닥에 맨몸뚱이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식론적 전환과 같은 수준에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가족공동체와 정을 주고받으면서 생활해 왔던 이러한 동물들이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문제는 인간에 대한 책임의 문제뿐만 아니라, 동물의 권리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의미는 행성계의 좌표를 변화시키는 혁명적 변화를 의미할 정도로 큰 인식론적 차원의 변화를 의미한다.

동물의 성인인 프란시스코는 새들과 얘기하고, 동물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기성교회의 입장에서 이러한 프란시스코의 생각은 매우 급진적이었으며, 중세교회를 움직이기까지 프란시스코에게는 고난의 행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피조물이라는 개념은 불교의 화엄사상과 매우 가까운 생각이었으며, 교회 내에서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프란시스코의 생각은 중세적 사고양식에 대한 도전으로서 매우 급진적인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신에게 축복받은 인간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하게 신에게 축복받은 동물이라는 생각이 말이다.

칸트가 근대인들의 사유의 지평을 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인식론적 차원의 거대한 변화라고 생각했을 때, 중세의 어둠은 한 줌의 미몽으로 바뀌었으며, 새로운 희망의 불꽃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규명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려동물의 유정성이라는 의사소통능력에 대한 인정은 매우 급진적인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것은 동물권을 긍정하면서, 생명의 존엄과 가치에 기반한 새로운 행동에 나서게 할 것이다.

인권이나 주권을 넘어서 생명권과 동물권을 주장한다는 의미는 하나의 인식론적 대전환을 의미하며, 동물과의 의사소통행위인 정을 느끼는 행위를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동물을 인식적 주체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고 인식하기 위해서 굳이 동물을 기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연이자 동물은 바로 인간 자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동물성에 권리를 주는 것이야 말로, 사실상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해방적 권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바로 인간들이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이며, 미래세대에게 권리를 주는 것은 바로 동물에게 권리를 주는 것이 될 것이다.

6. 칸트의 실천이성과 실험동물과 동물윤리

칸트가 정언명법을 통해, 보편적인 의지의 격률에 합당하도록 행동하라고 하는 언급에서 보편적 의지의 격률은 생명 일반의 의지라고 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보편의 차원은 인간의 의지라는 차원을 넘어선 생명 보편성을 획득하고, 생명윤리의 시각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할 것이다. 실험동물의 상황은 생명 보편주의가 적용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인간의 병을 낳거나, 생명공학의 발전에 동원된 동물들은 실험실에서 암 덩어리를 이식받으며 천천히 죽어가도록 연구 설계되고 있다. 이 연구디자인에는 생명윤리라는 윤리명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생명공학의 정언명법은 오로지 산업적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생명체에 대한 실험은 허락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언명법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을 위하는 행동이 생명을 위해하는 행동과 이율배반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목적테제는 도구와 수단에 의해서 괴리될 수밖에 없으며, 정언명법은 가언명법의 수준으로 치부될 상황에 이르게 된다.

생명권 보편주의의 실천이성에 따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이기에 따라 변조할 수 있는 가언적 상황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실험동물이라는 존재자체의 이율배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실험은 연구공간이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동물들의 삶과 죽음은 천천히 관찰되어진다.

왜 이 동물들이 천천히 죽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 폐쇄된 환경 속에서 철저히 감추어지거나 질문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물론 이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생명을 위해서 다른 동물들을 죽여도 된다는 도구적 이성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이율배반에 대해서 응답하지 못한다면, 동물실험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허용될 수없는 것이다.

동물실험의 천국이 되어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마치 동물복제가 대단한 피조물을 만드는 일인 양 떠들어대는 언론과 그 환상 속에서 생명권 보편주의라는 정언명법을 잊어버리고 환상에 젖어든 사람들 속에서 작은 동물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으며, 알 수 없는 약물과 스트레스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것이다.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가장 최선의 실험윤리는 바로 자신을 대상으로 한 실험만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외부의 자연대상에 대해서 실험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을 불허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실험은 극도로 열악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변수를 추출하는 행위라고 할 때 이미 생명권 보편주의를 위배한 학대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대상을 실험수단으로 삼는 순간, 정언명법의 칸트의 실천윤리와 위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이드라인조차도 없고 생명윤리와 가치명제의 개입이 없는 사실명제로서의 정당화논리는 긍정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인가? 라는 사실명제를 위해서 동물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이 속에는 가치명제의 명백한 개입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명제와 가치명제의 이분법은 자유의지와 자연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가치와 윤리에 의해서 연구 디자인된 실험만을 긍정하는 적극적인 생명윤리와 생명권 보편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오며 : 칸트주의적 동물권의 재구성을 위하여

칸트의 철학은 동물권을 사고할 수 있는 인식론적 패턴과 형태를 제시해 주는 매우 귀중한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비록 인간중심주의를 태동시킨 사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할지라도 칸트의 철학을 생명권 보편주의의 시각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 후대 철학자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분석명제는 이제 희귀, 멸종동물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응답하여야 하며, 칸트의 종합명제는 이제 동물원 동물들이라는 새로운 상황에도 응답하여야 한다. 칸트가 선험적인 이성능력을 강조하였던 것은 이제 동물의 시각에서 유정성이라는 선험적 의사소통의 능력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유정성은 공리주의와 칸트주의적 동물권의 경계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가 단순히 유정성을 고통을 느끼는가의 여부로 한정한다면, 칸트주의는 유정성을 정을 느끼고 소통할 수 있는 매우 적극적인 능력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이 유정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는 동물의 권리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야생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동물들의 선험적 능력으로 개체무리들이 스스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자연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적극적인 능력을 사고할 수 있다. 야생성은 동물 계몽주의라는 기존 입장에 대한 반박으로 사고되어야 하며, 인간의 영역이 넓어졌을 때 동물의 영토가 줄어들게 되는 문명사적 괘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의 실천이성의 정언명제는 생명 보편주의의 시각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그것은 동물의무론의 기초이며, 또한 역으로 동물권리론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물자체와 달리 전문가집단과 공장식 사육장, 연구소등이 판단할 수 없는 물자체 영역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은 자연대상이 물자체라기보다는 인간의 영역이 물자체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실험동물에게 사실명제로서의 진리에 적극적으로 가치명제를 도입하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즉, 가치와 윤리에 의해서 연구 디자인 되지 않은 진리는 더 이상 유효성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사고했던 칸트에게서 인권을 넘어선 생명권의 영역으로 전환을 시도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인식주관의 영역을 포괄적인 생명의 유정성으로 대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의 동물권은 공리주의의 동물권보다 훨씬 훌륭하게 동물에 대한 시각교정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형태와 패턴을 갖고 있다.

근대사상의 교두보로서의 칸트를 이제 탈근대사상의 교두보로서 변형함으로서 나아가 동물해방과 생명 평등주의의 세상을 여는데 칸트가 나서야 한다고 독려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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