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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리와 누렁이를 잇는 생명의 그린벨트는 없는가/박창길교수
동보연 2008-11-27 12:39:08

비오리와 누렁이를 잇는 생명의 그린벨트는 없는가

: 환경운동의 지평에서 바라 본 동물학대와 개고기 법제화
성공회신학대학 박창길교수

이렇게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발표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잘 것 없이 취급되는 동물권의 문제를 환경운동의 의안으로 받아 들이며, 이들의 생명권을 대변해줄 수 있는 훌륭한 분들을 찾아 이들의 문제와 권리를 위탁할 수 있을까하는 바램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동물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인간사회의 세력이 매우 취약하여, 동물과 관련된 제반 사회입법의 경우, 동물들의 이해가 반영되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개고기 도축법제화를 둘러싸고 이 것을 둘러 싼 문제의 정의가 인간만의 이해를 위한 위생의 문제로만 취급되고 있다. 이를테면, 주요 언론들의 경우도, 이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 취급한 경우가 없다.

한편 동물학대의 문제, 특히 개고기 도축법제화의 문제는, 개들을 위한 이해를 대변해주는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가 21세기의 相生의 文化를 선택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우리가 명심하고 통과하여야 할 시험 관문이기 때문이다.

개고기도축 법제화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개고기의 도축문제를 "음식"의 문제, "위생"의 문제로만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새만금의 갯벌을 위한 인간의 농토를 위한 개간지로만 보거나, 동강을 서울 시민의 용수 공급지로만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새만금이나 동강을 통해서, 이러한 자연이 인간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의 서식지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도축의 대상이 되는 누렁이도 우리의 "음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인간이 소유할 수도 없고, 인간의 전횡대로 학대할 수가 없는 不可侵의 領域이 있고 이런 영역에 대한 尊重이 필요하다.

이것은 부모가 어린 자식을 낳았으면서도, 자식을 소유로 알고 학대를 하면 처벌을 하는 법을 만들어 부모가 넘나들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모든 생명은 때로 우리의 생존과 기본적인 욕구를 위하여 취할 수 있지만, 마음대로 아무 때나 침범할 수 없다. 生命倫理의 길을 열어간 슈바이처에 의하면,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들판에서 잡초를 뽑는 것은 윤리적으로 아무 잘못이 없지만, 농사일을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 길가의 아무리 작은 잡초라도 함부로 뜯어서 생명을 해치는 것은 윤리적으로 罪가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과 같은 다른 생명을 불가피한 이유가 없이는 해치지 못하는 領域이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들을 개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골프장을 짓기 위해서 다른 작은 생명체의 공간을 침범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개고기를 생존을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식도락을 위해서 먹는 것은 골프장을 짓기 위해서 숲을 파괴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고기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과거에, 가렴주구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개고기라도 먹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에서 큰 아버지가 일년에 서너 차례 도시에 있는 우리집에 찾아 오셨을 때에만 벌건 소고기국을 끓여 먹었다.

도시의 중산층인 필자의 집안이 이러했는데 궁핍한 시골에서야 어떠했을까. 우리가 생존이 어려우면, 원숭이 고기를 먹은 들 잘못이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궁핍한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生命尊重의 사상은 우리 나라의 傳統을 꿰뚫어 오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잡혀먹은 어미 짐승의 뼈가 새끼들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이를 참회한 신라사람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고려조 이규보의 문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어제 저녁, 한 고약한 사내가 큰 몽둥이로 떠돌아다니는 개를 쳐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몹시 불쌍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개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면, 고려 중기에도 개를 몽둥이로 쳐죽이는 사람이 있었고, 또 이를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선조가 있었다. 이런 "萬物平等論"적인 생각, "萬物一類"의 생각은 조선조 홍대용, 박지원 등의 저술에도 나타나며, 서민 문화 속에서 흥부의 이야기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 나라의 흥부이야기는 궁핍한 경제 속에서도 작은 생명이라도 불필요하게 해치는 것을 경계하며, 생명간의 相生과 인간끼리의 和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가장 훌륭한 이야기이다.

지금은 음식이 생존을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식도락을 위해서 먹으며, 이런 면에서 생명의 과소비이다. 우리 나라의 전국관광지는 물론이고 시골 어느 모퉁이를 가봐도 "암소갈비", "시골촌돼지," "제주민속돼지"등 온갖 향락을 위한 육식문화가 만연하다.

특히 개고기는 우리 나라의 보신 문화의 대표 격이다.
지금의 현황은 식도락을 위해서 먹는 것이 지나친 만큼, 환경문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나 돼지를 먹지 말거나, 그렇게 못하더라도 고기 소비를 줄여야한다. 또 우리 나라의 과소비문화를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줄여야 한다.

개고기를 반대하면, 흔히 하는 질문이 소고기는 왜 반대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사실 소고기도 반대되어야한다. 사실 경제선진국들이 소만 먹지 않아도 전세계 식량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한다.

소를 사육하는 초지를 사람을 위한 곡식을 심으면, 10사람의 양식을 기를 수 있는데, 소를 사육하기 위해서 열대의 우림을 개간하기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되고, 원주민들의 생활기반이 무너지며 전세계의 식량문제가 대두된다고 한다..

특히 모든 생물이 소중하고 인간이 힘이 있다고 함부로 빼앗을 수 없지만 개는 과거 시대의 인간이기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동물가운데에 "이름"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다. 우리가 다른 동물에는 이름을 부치는 경우가 드물지만, 개는 모두 이름을 가진다.

우리 세대들은 "바둑이"라는 이름의 개를 모두 기억한다. 개는 사물로서의 "그 것"을 넘어, "너"로서 블려졌다. 얼마 전에는 진도에서 대전으로 팔려간 개가 수 천리를 걸어서 옛 주인을 찾아 가 화제가 되었다.

또 얼마 전에는 서울 성수동에서, 실직하여 길에서 술을 마시다 쓰러진 주인의 곁을 밤새도록 지키며, 보호하던 개도 있었다. 이런 개는 를 "너"라는 존재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일회용 도시락처럼 취급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인간중심적인 이기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개만을 "너"로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동물과 자연적인 존재는 우리에게 친구이다. 우리는 소도 이름 붙일 수 있는 존재이다.

또 우리의 강도 산도 이름 붙이며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비오리가 상을 받지 않았던가? 그래서 모든 자연 속에 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beauty)과 가치를 가지면서 우리의 일회용 자원으로 축소되거나 비루하게 취급되어질 수는 결코 없다.

7년인가를 땅속에 있다가 여름 한철 나무에서 우는 매미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생명의 소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생명에 대해 존중해달라고 우리 문화에게 요구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먼길이다. 나는 다만 개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우리가 우리 주위의 모든 자연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주의로 인해 "아름다움이 상실된 사회"를 극복하는 새로운 천년을 위한 비전이 될 것이다.

식도락을 위해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내가 먹는데 누가 뭐라느냐"는 식이고 사실 음식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하는 것은 화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환경의 위기를 인식하고 난 지금 시대에 이 세계는 이미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세계, 나만의 우주가 아니다.

이런 인식의 세계관은 마치 인간이, 내가 독점하는 세계이다. 나만이 존재하는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는 모든 생명이 나누어 가지는 세계이며, 우리는 이 세계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서 자연으로부터 왔으나, 자연의 소유주는 아니다.

특히 비판적인 지식인들조차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많아, 이런 문제에 대한 토론을 기피하고, "음식"인데 라고 무슨 문제냐 하며 합리화하지만, "음식"이라는 문화적 범주가 다른 생명에 폭력성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냉철히 자성해보아야겠다.

환경파괴를 가져오는 것 치고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적 만족을 위한 소비인 점에서 인간의 "음식"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또 우리가 먹는 것이 생태계의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과는 성격이 같은가?

이런 분의 반응의 예를 들어보면, "우습다. 개고기 도축 및 유통합법화에 대한 찬, 반 논쟁을 하는 것이 우습다. . . . . 개고기 도축 및 유통합법화 이전에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과연 개고기를 먹는 것이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비난받을 성질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선 나의 입장은 개고기를 먹는 것이 전혀 잘못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먹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성질의 음식이 있다면 사람은 왜 사는가?

난 개고기도 하나의 음식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합법화다 반대다 모두에 불쾌함을 느낀다. 아니 도대체 먹는 것에 대해서 제재를 가한다니 말이나 되는가? 마약이나 히로뽕 기타 향정신성 의약품들이야 인간에게 미치는 피해가 자못 심각하므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건 자기 자신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식으로써의 개고기는 다르지 않은가? 다르다면 이 글을 읽는 분께서 반론을 주시기 바란다. 그 이전에 개고기가 안되면 고기 자체가 안된다 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 . 우리는 기초부터 바로 정립해야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과연 개고기를 먹는 것이 남에게 혐오감(먹지 않는 사람 중 개를 사랑하는)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한 다음에 법제화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해도 되지 않을까? 혹 법제화되고 난 후에 잘못이 밝혀져도 헌재에서 위헌심사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또 다른 생명체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소리를 듣는 마음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이예령씨의 말이 그러하다. "동물들도 우리와 같이 아픔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개를 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자신이 입장을 바꿔 거꾸로 매달려 숨이 멎을 때까지 죽도록 맞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물론 소. 돼지 등등 많은 동물들을 먹는다는 것도 반대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사실 동물보호운동의 기조를 이루는 동물해방론(animal liberation)에서 발견될 수 있는 마음이다.

그런데 실제로 동물학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쓴 내용을 보면, 다른 존재가 느끼는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형태가 다른 존재의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이야말로 21세기를 건설하기 위해서 간직해야할 마음이다.

보통 범죄자들의 범죄행위를 교정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 중의 한 방법이 자신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겪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 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 나아가서 우리와 형태가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들을 수 없는 사회가 바로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다른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 소통을 하지 못하는 문화는 소통하지 못하는 다른 존재를 정복하고 길들이고 폭력을 휘두른다. 개고기 도축법제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가 生命尊重으로 조사되었다.

이점은 相生의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도덕적 원천이 있다는 점에서 깊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 것은 "다른 생명체의 苦痛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은 우리 사회의 평화를 건설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相生의 文化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생명의 고통을 들을 수 있는 마음뿐만 아니라, "산처럼 생각하는 마음"(thinking like a mountain)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마음은 서로 排他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重疊되면서 補完되는 마음들이다.

많이 논의된 바대로, 서양의 근대문명은 인간위주의 문화이며, 다른 생명을 기계로 인식하는 문화이다. 현재의 동물학대방지운동은 바로 이러한 인간위주의 서구 문명에 대해서 반성을 하는 운동의 한 갈래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외국 시민단체의 개고기 도축반대에 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반대를 마치, 서구의 특정 국가가 文化的 帝國主義의 입장에서 우리 나라 문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이를테면, 김홍신 의원은 바르도 씨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나는 이런 당신에 대해 문화적 상대주의도 모르는 무식쟁이"또는 "자문화 이기주의에 빠진 독선주의자"라고 단정합니다(1999년 8.17일 보도자료)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식인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비난을 받고 있는 프랑스 배우 출신의 바르도씨 같은 경우는 프랑스문화를 우월하다고 보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바르도씨는 파리에서 모피옷 패션쇼 행사장에 가서, 난리를 피울 정도로 반대를 한다고 하며, 동물학대를 통해 만들어진 거위 요리의 경우에도 그 곳 동물보호시민단체의 신문광고 등을 통한 항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외국 시민단체의 비판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의 개고기 도축과 같은 문제가 우리가 건설하고자하는 21세기 생명문화의 입장에서 우리의 현재의 문화의 구석 구석에서 비생태적 문화를 가려내고 비판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가 기초로 한 우리의 신앙, 우리의 심리학, 심지어는 우리의 환경과학의 방법론에서도 非생태적인 것을 가려내어야 한다. 환경운동의 중요한 부분이 문화에 대한 총체적 반성인 만큼 이런 반성이 우리 지식인과 환경단체의 몫이 아닌가 한다.

사실 이런 단체가 추구하고 있는 기본적 정신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상생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사정이 이런 데도 문화적 상대주의를 내세우며 개고기 법제화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자존심을 높이는 길이 못 된다.

또 이런 외국 단체의 비판을 인종주의와 연결시켜 비판하는 것은 오해이거나, 모함의 성격을 띤다. 동물보호운동의 근간이 되고 있는 동물해방론(animal liberation)이나 동물권(animal right)운동, 여성환경이론가들의 동물보호론은 정치적인 의미를 띠고 있으며, 여성, 소수민족 등의 권리회복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동물권운동은 과거에 여성이나 소수민족을 차별할 때, 이들을 동물과 동등시하면서 동물과 같이 취급하여 차별하였다. 동물에 대해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가 인간에 대해서 감수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물에 대해서 감수성을 가진 사회는, "劣等하다고" 인식되는 사회계급에 대한 폭력을 극복할 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제(Marcuse)나 리프킨(Rifkin)이 이야기하는 대로 동물의 학대만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본성과 "에로스"를 해방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연속에 들어 갔을 때, 인간사이의 갈등과 인간의 내면적 갈등에서 얼마간이라도 벗어 나면서 자신을 되찾는 것처럼,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의 환경운동이 종래의 공해중심에서 생태계나 생명중심으로 옮아가고 있지만 일반 우리 나라 사회의 환경론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고기 도축법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인천에 있는 도축업자인 경우에는 유력한 환경단체의 회원임을 내세우면서, 환경문제해결을 위해서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각계에 피력하고 있으며, 이런 의견이 주류 신문과 잡지들과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이다.

즉 다른 생명의 한순간의 식도락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이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도축할 때, 흘리는 피와 내장이 지하수와 땅을 오염시키는 것이 문제이며, 이러한 오염을 막기 위한 도축의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것이 우리 나라의 주류 환경사상이 되지 않으리라고 전망하지만, 환경운동이 기능적 환경론의 입장서 문제를 바라보고, 생명의 문제를 도외시할 때 이런 결과가 온다고 본다. 사실 개를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사육하고, 도살하더라고 이것이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되거나 생태계의 전일성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만 바라보며는 이 세계를 기능적인 입장에서는 바라보게 되면, 근대세계가 잃어버린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올 수 없다. 이 세계는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생물과학적 생태주의로만 세계를 파악하는 경우, 잃어버린 이 세계의 깊이를 되찾아 올 수 없다.

이런 환경운동의 지평에서는 최승호 시인이 문제삼는 "가두리양식장"으로서의 우리 사회를 구제할 수 없다.

더구나 개고기 법제화를 추진하는 이면에는 개고기를 국민식품으로 할 뿐만 아니라, 개고기 산업을 국가의 주요 축산산업으로 일으켜 나가려는 원대한 포부도 있다. 한국축산식품학회의 임원인 경상대 주선태 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생명공학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생명공학을 이용하여, 인간의 입맛에 맞는 식용견을 만들어내어 축산업을 발전시키며, 수출산업으로 키워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보며, 제비의 다리를 조작하는 방법을 통해서 황금의 호박씨를 구하려는 놀부의 마음과 황금 알을 낳는 생명의 발명을 유전자조작을 통해서 이루려는 지금의 과학자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을까.

생명공학의 안전성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주인을 충성스럽게 따르던 개가 도축장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이러고도 우리 문화가 축복 받을 수 있다고 믿기가 어렵다.

흥부가 걱정하는 일은 현대의 여성환경이론가들에 의해서 이런 유전공학이 기초로 하고 있는 생물학이 기초가 경제적 원칙을 추구하며, 생명공학자체가 폭력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폭력이 놀부의 호박으로부터 뛰어 나와 우리를 징벌하는 괴물들의 응징이 아닐까.

개고기 도축법제화가 가진 문화적 의미를 철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동강의 비오리와 모란시장의 쇠 우리 에 갇힌 누렁이, 생명공학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사람의 귀가 달린 토끼를 잇는 그런 "생명의 그린벨트를" 세워야 한다.

참고로 유럽의 녹색당은 동물권을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고 있으며, 리우회의 NGO 공동 선언문은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 반성과 제언에 덛붙여, 이러한 선언의 목표가 "생명에 대한 존중(reverence for life)"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흥부의 이야기를 살아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우리 환경운동가들이 국민들에게 "흥부의 길"을 가라고 간곡히 권고해줄 수는 없을까? 보길도의 돌을 "바다를 연주하는 악기"라고 했는데, 우리는 누렁이가 일회용 보신탕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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