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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탕 문화에 대한 생명윤리적 접근/한면희박사
동보연 2007-07-06 11:39:12

보신탕 문화에 대한 생명윤리적 접근

보신탕문화 국제 심포지움 발표문
보신탕 문화에 대한 생명윤리적 접근
한면희 (환경정의시민연대 환경정의연구소장, 철학박사)

1. 한국 보신탕 문화에 대한 논쟁 현황

한국의 보신탕 문화가 서구 사회에서 논란의 쟁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무렵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 개막을 앞둔 시기다. 당시 브리짓도 바르도를 필두로 한 동물애호가들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서유럽에 한국의 보신탕 문화가 대표적인 야만적 문화의 한 형태로 비춰졌었다.

특히 각종 서구 언론이 이 문제를 부정적 형태로 다루면서 더욱 쟁점이 되었다. 그런데 2002년 5월 말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한일 월드컵이 개최될 예정이어서, 또 다시 한국의 보신탕 문화가 과거와 유사한 형태로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

보신탕 문화가 전세계에서 한국에만 고유한 것은 아닐텐데, 한국이 집중적으로 서구인에 의해 도덕적 몰매를 맞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한국이 경제성장을 토대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는 과정에서 최대의 국제적 행사를 치루게 되었고, 그러면서 보신탕 문화가 다른 나라의 것에 비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외형상으로 소개된 보신탕 문화에 대한 논쟁은 비교적 단순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보신탕 문화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서유럽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 즉 동물애호의 시각과 동물권 시각에서 보는 것인 반면, 보신탕 문화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국내 시각은 다양한 음식 문화의 차원에서 조망하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과 가치관을 취하면 보신탕 문화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반면, 후자의 관점에 서게 되면 긍정적으로 보기 쉽다. 이렇게 보신탕 문제를 보는 가치관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비난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형태로 논쟁이 소모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보신탕 문화를 둘러싼 논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한 문화 현상에 대해 올바른 가치 평가를 내리려면, 그 문화가 처한 환경 여건의 영향을 고려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보다 분별력 있게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필자는 보신탕 문화와 관련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관련 쟁점을 다각도로 드러낸 뒤, 끝으로 필자의 입장을 정리하겠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본디 쉬운 문제를 어렵게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다소 복잡한 문제를 쉽게만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

2. 보신탕 문화와 문화 상대주의

보신탕 문화를 옹호하는 한국 대다수의 논자는 흔히 문화 상대주의를 거론한다. 그러나 이 문제 언저리에는 윤리적 상대주의가 개입되어 있다. 따라서 문화 상대주의와 윤리적 상대주의의 차이와 관계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문화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는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 현상을 들여다볼 경우 문화마다 서로 도덕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문화 상대주의는 대표적으로 문화 인류학자에 의해 주장되었다.

여기서 살펴야 할 점은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권은 서로 다른 도덕 관련 문화적 양태를 갖고 있다는 사실(facts)에 대한 주장을 문화 상대주의가 한다는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가 문화 관련 사실을 규명하는 학자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얘기다.

문화 상대주의의 사례는 숱하다. 예를 들자면 캐나다 벤쿠버 섬의 원주민인 크와키우틀 부족은 사치를 도덕적으로 허용하는 반면, 아프리카 부시맨 부족이나 북미 에스키모 부족은 사치를 도덕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음식 문화의 도덕적 상대성과 관련된 경우를 보자. 힌두교를 숭상하는 인도인은 암소를 숭배한다. 따라서 암소고기 먹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면서, 돼지고기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거리낌도 없다. 반면 회교도와 유태인들은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간주하여 돼지고기 먹는 것을 비판하지만, 역시 소고기나 양고기 먹는 것은 당연시한다.

마찬가지로 개고기 음식 문화와 관련해서 도덕적 평가가 서로 다른 두 문화 집단이 존재한다. 서유럽은 적어도 오늘날 개고기 먹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판한다. 반면 한국은 과거부터 개고기 먹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판 대상으로 삼지 않고 용인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한국에서 보신탕 문화는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 문화 상대주의는 이렇게 문화권마다 다소 다르거나 또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적 양태를 보이고 있고, 그런 문화적 양태에 대해 고유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전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신탕 문화와 관련해서 문화 상대주의는 그저 서유럽과 한국이 다르다는 사실을 전해줄 뿐이다.

3. 보신탕 문화와 윤리적 상대주의

그런데 보신탕 논쟁과 관련해서 핵심이 되는 사안은 서유럽의 도덕적 잣대를 기준으로 한국의 보신탕 문화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으냐에 있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우리의 그릇된 행위 형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반면 그것이 그르다면, 우리는 보신탕 문화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서유럽에 대해 더 이상 우리 행위 유형에 대해 도덕적 왈가왈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평가는 문화 상대주의를 넘어서서 윤리적 상대주의 및 보편주의 논쟁으로 이행할 때 가능해진다.

역사적으로 인도 안에 회교가 전파되어, 인도인 가운데는 전통적 힌두교인과 회교도 부락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비극의 씨앗이 있다. 힌두교도가 인도 회교인의 소고기 먹는 행위에 분노하여 마을 부락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사람까지 죽이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인도 힌두교도가 회교인의 마을을 습격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 집단이 윤리적 가치 평가를 행하고, 이를 토대로 상대방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실력행사에 돌입함으로써 빚어진다고 할 수 있다. 힌두교와 회교의 음식 문화는 서로 다르다.

특히 소고기 및 돼지고기 음식 문화와 관련해서 상반되게 다르다. 문화 상대주의는 문화권마다 행위 유형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사실만을 언급할 뿐이다. 그런데 가치 평가를 토대로 상대방의 행위에 개입했다는 것은 윤리적 상대주의 및 보편주의의 문제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윤리적 상대주의(ethical relativism), 특히 규약적 윤리 상대주의는 도덕이 문화의 산물이고, 지구촌 문화가 각기 다양하므로, 원칙적으로 지구촌 모든 문화에 보편 타당하게 적용되는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에 서게 되면, 힌두교 문화와 회교 문화가 다르므로, 힌두교 문화의 고유한 도덕적 잣대를 절대적 잣대로 삼아 회교도의 소고기 먹는 음식 문화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게 된다.

필자는 윤리적 상대주의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것과 무관하게 힌두교도가 자신들의 음식 문화의 행위 유형을 잣대로 회교도 행위에 개입하여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연장선상에서 서유럽의 개고기를 거부하는 음식 문화의 행위 유형을 잣대로 삼아 한국인의 보신탕 문화에 대해 도덕적 시비를 거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대체로 옳은 말이다.

한국인 대다수는 이런 맥락에서 보신탕 문제를 바라보고 있고, 그래서 서구인의 간섭 행위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이런 정서에 대해 서구인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구인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해서 보신탕 문화가 과거나 지금이나 그대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4. 보신탕 문화와 윤리적 보편주의

지구상에는 숱하게 많은 민족이 살고 있고 또 그들이 거주하는 터전인 생태계가 고유하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생태주의 관점에서 생물 다양성이 중요한 만큼, 건강한 지구인의 삶을 위해 문화 다양성도 존중되어야 한다.

지구상에 문화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화 상대주의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음식 문화의 상대성은 문화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문제의 요지는 한국 보신탕 문화에 대한 평가가 윤리적 상대주의만으로 족한지 아니면 윤리적 상대주의를 넘어선 영역, 즉 윤리적 보편주의에 해당하는 지를 아는 데 있다. 이것은 윤리적 상대주의와 보편주의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범문화적으로 보편 타당하게 적용되는 도덕 원리가 존재함을 부정한다. 도덕이 문화의 고유한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한 문화권의 도덕 규칙을 잣대로 다른 문화권의 행위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반면 윤리적 보편주의(ethical universalism)는 지구상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문화에 관통되는 도덕 원리가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것이 옳거나 더 나은 견해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문화인류학사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여성에 대해 가장 잔인한 문화를 갖고 있는 부족이 야노마모 부족이다. 이 부족은 남성 가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성에 대해 남성이 도끼를 던지더라도 허용한다.

심지어 남편이 무서워 친정으로 도망을 갈 경우, 이번에는 친정 오빠가 광으로 도끼를 가지러간다고 한다. 이 얼마나 가부장적이면서 잔인한 여성 학대 문화를 갖고 있는가? 현대의 페미니스트가 본다면,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우리가 태평스럽게 한 문화의 관습적 행위는 윤리적 상대주의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일에 우리가 괘념하지 말자고 할 수 있는가?

마링 부족에게서 행해지는 여아 유기에 대해서는 어떤가? 아니 그 부족은 얼마나 미개하면 여아를 죽게 갖다버리는 짓을 허용하는 것일까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는 그런 것이 행해지는 이유를 추적하여 밝혀놓고 있다.

마링 부족은 단백질과 지방을 제공하는 돼지를 사육하고자 많은 화전 밭을 필요로 하고, 이를 위해 이웃 부족과 빈번하게 전쟁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남성 무사가 상당수 죽어간다.

여기서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돼지 사육의 일이 맡겨진다. 여성은 가급적 무사로 자랄 남아를 출산하여야 하며, 여아를 출산할 경우 장차 튼튼한 여성으로 성장하여 종족 번식이라는 재생산 일을 수행하면서 또한 돼지 사육이라는 고된 노동도 감내해야 한다.

이때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으로 죽는 남성 무사의 수를 상쇄하더라도 장년 남녀의 비율이 크게 기울지 않도록 여자의 비율을 조절하는데, 이것은 은연중에 유아 가운데 튼튼하지 못한 여아가 죽도록 버려지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서구인의 눈에 미개하다고 보여지지만, 자신들의 행위 양태에 대해 나름대로 변명할 이유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우리 문화권이 야노마모 부족의 여성 학대나 마링 부족의 여아 유기 문화에 대해 도덕은 그들 고유의 것이니까, 그대로 존중하자고 할 수 있는가? 잘라 말하면, 그럴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윤리적 보편주의의 입장에 서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와 야노마모 및 마링 부족의 문화를 관통하는 여성 또는 아동 관련 보편적 도덕 원리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편적 잣대를 기준으로 들이밀고, 너희 행태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바르게 교정되어야 한다고 선의의 개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화 초월적으로 보편적 윤리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은 동시에 윤리적 상대주의가 그릇된 것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보편적 도덕 원리가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화 상대주의가 전해주듯이 지구상에 많은 문화 다양성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서 다양한 문화적 행위 양태가 있다. 이런 것 대다수는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의 한복 문화가 서구 의복 문화와 다르다고 해서 폐기될 수 없듯이 대다수 문화 양태는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앞서 살펴본 힌두교와 회교간의 갈등으로 나타나는 소고기 및 돼지고기 음식 문화도 그런 것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할 때 전쟁과 갈등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문화 상대주의가 사실이어서 지구상에 많은 문화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문화적 행위 양태가 존중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아님은 여성 문제나 생명 문제와 연관될 때 확연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생명 및 여성과 관련된 주제는 보편적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적 보편주의가 옳은 것일 경우, 문화 상대주의는 어떻게 되는가? 세간에 문화 상대주의는 윤리적 상대주의와 짝을 짓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아마도 상대주의라는 언어적 표현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문화와 도덕의 의존성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의존성이 강한 문화 결정성 논제고, 다른 하나는 의존성이 약한 문화 제약성 논제다. 문화 결정성 논제는 문화가 도덕을 결정한다는 것으로서, 이것이 문화 상대주의와 결합해서 윤리적 상대주의를 낳는다.

도덕은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데, 지구촌에는 숱하게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따라서 윤리적 상대주의에 의하면, 범문화적으로 통용되는 도덕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한 문화권의 도덕적 잣대를 기준으로 다른 문화 현상에 대해 개입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되게 된다.

이와 달리 문화 제약성 논제는 인류에게는 보편적으로 규정되는 도덕 원리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고유한 문화의 제약을 받아서 서로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즉 지구촌 전역에 흩어져 사는 민족에게는 고유한 생태계와 각각의 정신적 전통이 특색 있게 발달을 해서 서로 다른 문화를 구성하고 있고, 그 영향을 받아서 나름대로의 도덕 규범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나름대로의 도덕 행위 양태로서 사치와 관련되는 것도 있고, 소고기 및 돼지고기 음식 문화와 관련된 것도 있으며, 또 여성 학대 및 여아 유기 관련 사항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 도덕 원리 적용을 확연하게 승인할 수 있는 여성 학대 및 여아 유기 사안 이외에도 사치 및 음식 문화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가? 가능하다.

크와키우틀 부족의 사치 허용 이면에는 본디 그 부족의 생태계 여건이 풍요로운 상태에서 부지런함을 권면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의도가 담겨 있고, 부시맨과 에스키모 부족의 사치 배격에는 척박한 자연 여건에서 생태계 생명부양 여력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평등주의 사회를 구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모두 생태계 여건을 고려하는 선상에서 효용성과 자기 실현, 평등주의 구현 등이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셈이다.

소고기 및 돼지고기 음식 문화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암소 숭배 문화는 그들이 미개해서가 아니다. 카스트 제도로 계급화가 확연한 인도는 매우 척박한 자연 여건 속에서 많은 인구를 부양하고 있다.

이때 농사를 짓는 데 실질적 도움을 주면서, 소 재생산이 가능하고 또 저소득층의 연료로 똥을 제공하는 암소의 고기 맛을 지배계급이 알게 되어 잡아먹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이런 염려가 일찍이 소 숭배로 나타난 것이다. 중동 지역의 돼지고기 기피 문화도 마찬가지다. 되새김질 동물인 양과 소는 풀을 먹고 자랄 수 있지만, 돼지는 양식으로 콩이나 귀리, 밀, 옥수수 등을 먹기 때문에 인간과 먹이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간주하여 먹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결국 생태계와 인간을 고려하는 효용성 원칙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정의의 원칙이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셈이다. 다만 두 문화권에서 서로 상반된 행위 양태로 나타난 것은 보편적 원리가 서로 상이한 생태계 및 문화 전통의 제약적 영향을 받아서 달리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제 어느 견해가 옳은지는 확실하다. 반쪽 자리인 윤리적 상대주의에 비해 온전한 윤리적 보편주의가 설득력을 갖는다. 이렇게 되면 문화 상대주의는 윤리적 보편주의와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윤리적 보편주의는 규범적 주장이고, 문화 상대주의는 사실적 주장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보편적 원리가 고유한 자연 및 전통 문화 여건의 영향을 받아서 상이한 도덕 행위 양태로 나타난 것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사안에 따라서 평가를 달리할 수 있게 된다. 보편 원리에 현저히 저촉되는 문화 현상(예, 여성 학대 등)에 대해서는 도덕적 개입이 요청된다.

반면 보편 원리의 제약적 문화 현상(예, 힌두교도 및 회교도의 소고기 및 돼지고기 금기 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도덕적 및 실천적 개입이 불필요하다. 이것을 바르게 인식할 때 비로소 문화 충돌로 인한 분쟁과 전쟁을 피할 수 있다. 평화는 진리를 바르게 아는 데서 비롯된다.

5. 보신탕 문화와 동물해방론 및 동물권리론

윤리적 보편주의가 옳다면, 그 관점에서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보편 원리의 제약적 문화 현상에 그치는 것이면, 서구의 비판적 평가는 그릇된 것이다. 반면 보편 원리의 위반으로 간주되면, 서구 일각의 평가는 어느 정도 존중될 만한 것이다.

음식 관습은 모두 생태계 및 문화 제약적 현상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대체로는 그렇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식인 문화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보편 원리의 위반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 생명 존중에 대해 보편 윤리적 접근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1975년에 저술한 『동물해방론』(Animal Liberation)이 그것이다. 민주화가 진전된 대다수 국가는 공리주의를 정책의 원리로 삼는 편이다.

경제 정책은 특히 그렇다. 공리주의는 한 행위나 정책이 영향을 받는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고통 대비 즐거움을, 불행 대비 행복을, 불이익 대비 이익을 늘릴 때 도덕적으로 옳다고 한다. 지금까지 사회 공동체의 도덕 원리로 공리주의를 채택할 경우, 그 정책이나 행위로 인해 수혜를 보는 집단은 오직 인간뿐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공리주의 정책에 영향을 받을 자격 조건이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 또는 불행이나 행복을 누릴 수 있음, 불이익이나 이익을 받을 수 있음이 아니겠는가?

싱어는 공리주의의 원리에 비추어 볼 경우, 고통이나 즐거움을 겪을 수 있는 존재는 모두가 도덕 공동체의 수혜 범주에 들어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온갖 기이한 형태로 동물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인간의 행위는 청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동물을 모든 유형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싱어는 주장한다. 싱어는 동물 생명의 존중을 공리주의의 길에서 찾기 때문에, 동물에게 엄격한 도덕적 권리까지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싱어와 달리 의무론적(deontological) 접근을 통해 동물에게 도덕적 권리를 부여하는 견해도 등장했다. 1983년에 톰 레간(Tom Regan)이 저술한 『동물권리론』(The Case for Animal Rights)이 그것이다.

레간에 의하면, 한 인간이 동료 인간에 대해 생명과 자유. 행복 추구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칸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인간은 누구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를 받을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적으로 대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 각자가 고유한 생활(life)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간은 동물도 생활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물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를 받을 내재적 가치를 가지며, 따라서 인간이 생명 존중의 원리로 조망하면 동물은 침해받을 수 없는 도덕적 권리를 갖게 된다.

동물을 고통에서 해방시키자는 싱어나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자는 레간의 견해는 서로 다른 접근법의 소산이지만, 귀결점은 동일하다. 동물 생명 존중론이다. 그들은 특히 대량으로 사육하는 기업농의 행위와 과학 실험실에서 자행되는 동물 학대에 대해 분노한다.

이들은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아야 하기에 또는 동물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존중해야 하기에 모두 채식주의로 돌아선다.

또한 이들의 동물 생명 존중론을 운동의 실천 이념으로 천명한 단체도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ALF(Animal Liberation Front)와 1980년에 등장한 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lmals) 등이 있다. 최근 비틀즈 멤버이자 PETA 회원인 폴 매카트니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지 말자는 호소를 운동으로 전개하고 있다.

매카트니가 우유를 마시지 말자는 것은 아이들에게 우유가 나쁘니까 먹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야생 동물에 대한 음식 수요가 많으면 많을수록 야생 동물에 대한 밀렵이 근절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 때부터 우유 수요를 창출하면 할수록 소의 우유를 착취하는 인간 집단이 지속되어, 소에 대한 고통이 가중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동물 생명 존중의 차원에서 보면, 한국의 보신탕 문화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너무 당연하게도 금지되어야 할 행위로 여겨진다. 브리짓도 바르도가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야만적이라고 비판한 것은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6. 보신탕 문화와 생명윤리적 접근

혹자는 보신탕에 사용되는 고기가 애완견이 아니라 식육견이라고 말하면서, 애완견의 관점에서 보신탕 문화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변한다. 물론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다. 실제로 낭만적 동물애호가들은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동물해방론과 동물권리론에 의거한 ALF 및 PETA와 같은 단체 회원들은 애완견이나 식육견의 구분 없이 보신탕 문화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들은 동물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부도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느 쪽인가? 생태주의자인 필자는 동물 생명 존중에 대해 다분히 우호적이다. 그러나 그 견해를 전적으로 모두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물해방론이나 동물권리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첫째, 동물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인간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사슴과 같은 연약한 동물이 맹수류에 의해 잡아먹히지 않도록 따로 격리시켜 보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생태계까지 훼손해가면서 동물에게 좋은 초지로 만들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것은 생태계 보전에 저해가 되는 행위다.

둘째, 생태주의자는 멸종에 처한 동물에 대해서는 여느 동물(예, 집 쥐)과 달리 특별한 도덕적 존중과 그에 따른 정책적 배려를 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셋째, 전통적으로 인간의 문화 가운데 상당수는 생태계 여건에 따라서 채식만으로 생존이 어려운 경우(예, 에스키모 또는 부시맨 부족 등)가 적지 않은데, 이런 문화 속의 인간에게 본의 아니게 기아로 떠밀 가능성이 있다. 바로 이런 몇 가지 문제 때문에 동물해방론과 동물권리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보신탕 문화를 그대로 존속시켜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비록 자연 보전을 위한 생태주의가 동물해방론이나 동물권리론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액면 그대로 동물존중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생태주의는 생명 존중론이기 때문에 양자간에는 부분 중첩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개고기 문화는 원칙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 이유에 비추어 다른 건강한 식생활 문화로 전환되거나 점차 퇴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첫째 생태주의는 인간의 문명이 자연의 생명부양 능력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속 가능할 것을 요구하며 또한 인간의 생기적 필요(vital needs)에 부응하는 것 이상으로 식량을 취하지 않고자 한다.

자연에 생명 에너지가 원활히 순환토록 노력하는데, 개고기 문화가 고착화되거나 확산되어 또 하나의 대량 가축 사육으로 진행되는 것은 그런 생명 에너지 순환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고대 지구촌 일각 및 한반도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졌던 고려장 문화는 절대적 식량 부족의 상황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자 생명의 대를 잇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취해진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화라는 이름 아래 여건이 달리진 지금에도 자행된다면, 마땅히 비난받을 짓임이 분명하다. 한국의 보신탕 문화는 이것과 많이 다른 점이 있지만, 불가피하게 진행된 점은 마찬가지다.

어려웠던 시절 상당수 한국의 농민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면서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쌀은 물론 보리마저 동이 난 상태에서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뙤약볕 아래에서 피를 뽑는 등 에너지가 많이 요구되는 논밭 일을 해야하는 시기였다. 이때 불가피하게 집에서 정들게 기르던 황구를 미안한 마음으로 보신탕으로 잡아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건이 달라졌다.

적어도 온갖 먹을거리가 풍부하게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미안한 마음으로 잡아먹던 보신탕 문화를 점차 축소하여 사라지게 하는 것이 온당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이제는 일체의 비난이 전개되지 않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 작은 도덕적 생각이라도 실행에 옮길 때라고 본다.

둘째, 오늘날의 생명공학이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 포함해서 유전자 조작을 함부로 자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광우병 파동이 인류에게 경고하고 있듯이 먼 후일 인류에게 커다란 재앙을 안겨줄 것으로 예측된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지배적 자세와 접근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눈꼽 만큼도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생명 일반에 대한 존중심이 요구되고, 그런 선상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해야 할 때라고 여겨진다.

특히 개는 동물 가운데서도 인간과 정신적 및 정서적 교류를 행하는 존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면전에서는 동료 인간에게 우호적인 체 하면서, 뒤로 돌아서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든 배신하겠다는 인간의 자세는 부도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일부 동물과, 대표적으로 개와 교류를 하게 되면, 개의 충직한 면모를 유감없이 확인하게 된다. 서양에서 간혹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중국에서도 자신의 유산을 개에게 남기고 죽은 사람이 있어 잠시 화제가 되고 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은퇴를 한 후 적적한 여생의 동반자로서 죽는 날까지 함께 해왔던 개에게 성의와 정을 표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다운 정리의 발로다.

애완견 여부에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충직한 개를, 충분한 먹거리가 있는 상황에서 오직 자신의 정력 증진을 위해서 뒤돌아서서 잡아먹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양식을 갉아먹는 형태가 될 것이다.

종합하자면,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비판하는 서양의 일부 논조는 음식 문화에 대한 간섭으로 비춰지는 한 빗나간 것이고, 그런 한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측면이 분명히 있다. 따라서 향후 서양인과 서양 언론은 이 점에 유념하면서 한국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서양의 일부 동물단체 회원의 문제 제기 취지는 생명적 관점에서 한국의 보신탕 문화에 우려를 표명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이 경우, 20세기 중반 이후 불어닥친 환경 재난과 20세기 말의 생명 조작으로 인해 지구촌 생명 위기가 고조되는 시점에서 그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하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실천적 노력의 일환으로 인간과 정을 주고 받는 충직한 개를 보신용으로 잡아먹는 풍토부터 서서히 자발적으로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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