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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부터의 해방, 동물복지의 역사/마이도그
동보연 2011-12-30 21:31:49

노예로부터의 해방, 동물복지의 역사

옮긴 글(마이도그) 2001/9~10월 호

18~19세기의 유럽사회에서 그다지 힘들지 않게 살았던 사람들은 매우 부유한 귀족계층 뿐이었다. 이들은 자신들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이것이 자신들이 가진 태생적인 권리라고 믿었다.

적어도 18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세기에 걸친 이러한 봉건적 구조가 사회의 기본구도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기득권층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능력과 의지에 상관없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독점하였다.

산업화 이전의 사회는 ‘가진자’와 ‘없는자’로 명확하게 이분되어 소수의 엘리트층은 소위 뼈빠지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았으며, 노동은 수만의 무학자와 무명의 농부의 몫이었을 뿐이다. 누구도 이러한 삶의 구조를 드러내놓고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상류층이 하층민을 부리는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라면, 하층민이 개들이 하는 일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는 없었을 것이다.

학대받는 어린이가 성장을 해서 학대하는 자가 될 위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분구조 내에서 억압받는 노동자들은 “노예개”라는 또 다른 계층을 만들어 내는 억압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개를 이용하여 무거운 짐수레를 끌게 하거나 한순간의 쉼도 없이 수시간 동안 방아를
돌리게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개들이 사회의 최하층 노동자 계급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정복한 것 중 가장 유용한 것은 개를 가축으로 길들였다는 것이다.”.

1865년 미국 여류작가 R. Lee의 이 말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이상한 것이긴 하지만, 결국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는 동물만이 “유익”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사나운 코끼리,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심지어 서커스 기술을
익히지 못하는 성질 못된 원숭이와 같은 동물들은 “살상”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유럽과 북미에 걸쳐 역축(노동력의 제공을 위해 길러진 가축)으로 길러진 “개 노동자”계급은
수세기를 걸쳐 결국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혁명과 사회혁명의 발생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었다. 노동의 가치를 잃은 사회구조 내에서는 계속해서 개를 기를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시절 개의 존재는 가난한 이들에겐 “말”이상의 가치를 의미했으며, 동물학대를 종식하자는 캠페인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캠페인은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인 동물애호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이들 불쌍한 노동견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요리용가래, 교유기 혹은 프레스 등의 트레드밀(물레방아처럼 발로 밟아 돌리는 바퀴로 평평한 원반의 둘레를 사람이나 우마가 밟으면서 이를 회전시켜 그 동력을 이용하는 장치)을 계속해서 돌리는 트레드밀 도그이다.

그리고 소형 짐마차나 여객용 마차를 끄는데 이용되던 커다란 마스티프(사나운 큰 개)류의 개가 그들이다.

이 시대의 농부들과 상인들에게 이런 개들을 소유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인간 노예나 노동자보다 훨씬 싼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도

법에 저촉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는 꾸준히 새끼를 낳을 뿐 아니라, 소, 노새, 말과 같은 덩치 큰 역축들과는 달리, 주인의 집안에서 식탁의 부스러기를 먹여 기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가재를 지키고 차가운 침대를 따뜻하게 해주는 등 부수적인 역할도 하는 일석 이조의 가치가 있었다.

중세에는 대개 크고 요란한 수평 회전식 화구에 가금류나 고기를 구워 먹곤 했다.

부유한 집에선 종종 어린아이들을 고용해서 불꽃을 지피도록 했지만, 대부분은 화덕에 트레드밀을 설치해서 몇 마리의 개를 이용해 이 단조롭고, 짜증스런 불지피기를 시켰던 것이다.

트레드밀의 회전판은 개가 멈춰설 수 없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소형견들이 품종과는 상관없이 이 회전판을 돌리는 데 이용되었는데, 그 사이에 이 노동을 위한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었다. 이름하여 “턴스피츠”(Turnspits)가 그들이다.

조지 R.제시는 1866년에 쓴 글에서 턴스피츠를 남잿빛 바탕에 검정 얼룩이 있고, 극단적으로 밭장다리를 한 모습으로 묘사한 바 있으며, 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토마스 뷰익은 1790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네 발 짐승의 역사(원제:History of Quadrupeds)”에서는 양쪽 눈의 색깔이 서로 다른 턴스피츠를 소개하고 있다.

즉 한쪽 눈은 검은색이고 다른 쪽은 흰색이라는 식으로, 조각이나 판화에 등장하는 턴스피츠는 어깨까지의 높이가 8인치 정도의 작은 개로 묘사되며, 오늘날의 닥스훈트와 많이 닮아 있다.(물론 이 두 품종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턴스피츠의 삶도 역시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당시에 많은 이들이 열사병과 탈수가 광견병의 원인이라고 믿고 있었음에도, 회전판을 돌리는 노동에 이용되던 개들에게는 최소한 물을 마시기 위한 휴식조차 없는 장시간의 노역을 해야 했다. 종종 반항하는 개들은 심하게 매를 맞기도 했다.

1822년 헨리 크로우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회전판에 매여서 탈출할 수도 없었다. 회전판 위에서 게으름이라도 피우면, 뜨거운 석탄을 발 위에 내던지는 벌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 작은 개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16세기의 영국사회에서 턴스피츠가 하던 두가지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들은 길고 긴 교회의 예배시간 동안에 주인의 발 위에 앉아 발을 따뜻하게 데우는 역할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목사가 지옥의 공포를 주제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지옥의 불은...(Fire...)!”하고 힘껏 소리를 지르자, 이 소리에 놀란 턴스피츠들이 무리를 져서는
교회를 우르르 빠져나오기 시작하였다. 부엌에서 회전판을 돌리라는 주인의 명령쯤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트렉혼드의 탄생

이와는 반대로, 마차를 끌도록 길러지고 훈련된 개들은 턴스피츠보다 10배는 더 컷으며, 오늘날의 마스티프나 롯트와일러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큰 개들은 품종에 관계없이 마차를 끄는데 이용되었지만, 180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특정한 품종이 이 역할 을 수행하게 되었다.

벨기에 태생의 트렉혼드가 그들인데, 다소 긴 다리와 호리호리한 몸매에 블랙과 화이트 그리고 황갈색(토우니)가 혼합된 털을 가졌으며 꼬리는 마구장식에 말려 들지 않도록 극도로 짧게 자른 경우도 많았다.

한때 이들의 길게 늘어진 귀도 흔히 잘려지곤 했는데 그렇게 잘라둠으로해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으나, 비나 눈에 의해 염증을 일으키거나 귀머거리가 되는 수도 있었기 때문에 후에 이러한 관행은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트렉혼드는 사냥견의 수행원 역할을 했던 것 같다.(몇몇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고대 견종으로 공격적이고 거센 힘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로마의 거대한 몰로서스의 후손인 듯하다. 수세기 동안 이 몰로소서의 후손들은 귀족의 놀이감이었다가 1700년대에는 농부나 상인들과 같은 가난한 계층민들도 소유할 수 있는 견종이 되었다.

사실상 이들을 이용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이었으며 -이 개들은 마차를 끄는 것고 같은 고된 노역에 걸맞는 짐승이라는 믿음과 함께- 교육과 교배를 거듭하면서 온순한 역축의 역할을 하도록 길들여 나갔다.

1800년대에 걸쳐 뉴욕과 런던, 브뤼셀과 암스테르담의 토요일 거리는 개들이 끄는 마차들로 북적였다. 농부, 정육점 주인, 빵을 만드는 사람과 각종 야채들을 부유층에 배달하거나 거리에 쌓인 넝마를 주워 제지상에게 파는 상인들이 끄는 마차들이었다. 한 세기전의 전환점에 선 어느 작가는 벨지안 트렉혼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힘과 건강의 상징으로... 참으로 놀라운 것은 덩치에 비해 월등히 무거워 보이는 짐을 끌 수 있다는 점이다.”

400파운드에 달하는 짐마차를 수마일을 가는 동안 지친 기색없이 꾸준한 속도로 끄는 세 마리의 트렉혼드에 대한 보고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믿기 힘들지만 어떤 개들은 주인이나 다른 동물의 도움없이 400파운드의 무게를 끌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도덕의 혁명

아마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턴스피츠와 트렉혼드들이 그 공급이 넘쳐나는 까닭에 주인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많은 개들이 트레드밀 위에서 혹은 마구를 쓴 채로 과로와 굶주림, 학대와 무관심 속에서 살다가 죽어갔다.

동물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경제구조 내에서 잔인성은 필요악이었다. 확실히 19세기의 하층 노동견들은 잔혹한 매질과 몸에 맞지 않는 마구와 과도한 짐과 탈수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턴스피츠의 경우, 이 잔인성은 닫힌 문 뒤에서 벌어졌다. -말하자면 무대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마차견에 대한 학대는 18세기~19세기의 도시에서는 -단지 거리의 풍경처럼 그저 일상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구를 쓴 채 지쳐버리면 채찍을 맞고, 곤봉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태워지거나 칼로 조각조각 잘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광경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주목을 끌만한 사건은 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 짐승들은 모두 주인의 ‘재산’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

1820년 이후 이러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두 가지의 사건이 었었는데 신사적이고 동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높은 교육수준을 가진 도시 중산층으로서의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은
(바이런 경이나 에드윈 랜시어 경과 같은 이들)자신들의 귀족정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동물 애호단체(여가를 위한 사육과 길들여진 동물을 드러내 보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를 결성하게 하였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개들과 사랑스런 관계를 맺게 되고 점차 개들의 조건없는 헌신과 사랑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인식이 큰 의미가 없는 거이었지만, 그럼에도 개를 단지 역축으로 느끼던 태도는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노예화나 매 맞는 개라는 시각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동물의 복지를 지지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1822년 리차드 마틴(영국 인도주의 운동의 아버지)은 영국 미사원(하원)에서 가축과 역축에 대해 잔인한 행위를 금하는 법안을 제출하였고 이것이 바로 “도덕의 혁명”의 때가 된 것이다.

동물학대 방지를 위한 왕립 협회(RSPCA/ Royr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가 의회와의 로비를 통해 개 마차의 사용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나, 이 의안에 대한 논쟁은 7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엘른버러 경은 저소득 가족은 이 법의 제재에서 제외시켜아 한다고 믿었던 반면, 브로럼 경과 같은 RSPCA 지지자들은 “도저히 올라탈 수 없을 것 같은 소형견들이 끄는 기구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개들이 거대하고 무거운 인간을 끌고 가는 걸 보는 것만큼 충격적이고 거북스러운 광경은 없다...”고 하였다.

RSPCA는 이 논쟁에 더해 광견병의 확산을 염려하였다. “광견병은 과열상태로 인한 것이므로, 개들이 자유로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는 탈 것에 묶여서 개들의 힘에 벅차서 헐떡이거나 거품을 물고 있는 개들을 너무나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개 마차를 이용하는 행상, 농부, 상인들에 대한 항의로서 1839년 영국은 최초의 개 마차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런던시 구역내 채랭크로스의 15마일 내에서는 개 마차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입법을 약화시키고 번복하려는 로비의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RSPCA 문건에서는 행상인의 청원이 국회에 받아들여졌는지 언급하고 있다.

청원의 내용은 행상인들이 개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들의 영업은 이 새로운 경찰법 하에서는 큰 타격이 되며, 도저히 말을 운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1843년 타임즈의 논설은 마차견의 운명에 대해 어두운 미래를 제시했는데, 만일 동물의 복지 운동가가 자신의 길에 충실했다면 수천의 마차견들이 죽었을 것이다. 이 합법적인 경로로부터 느닷없이 면직된 개 노동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자리를 잃은 마스티프들이 마치 철도의 등장으로 인해 길거리로 나않은 마부처럼 교차로에 몰려나오고, 정육점의 모퉁이에 처량하게 헤매야 하는가? 아니면, 보다 무서운 대안 (마차견을 죽여야 하는가)을 채택해야 하는가?... 템즈강은 영아살해의 새로운 자극하에서 강으로 뛰어든 강아지들을 수용할 수 있는가?

이런한 경각심을 자극하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개 마차 금지법은 수차의 개정을 거쳐 보다 확고해 졌고, 경찰에게도 영장없이 구속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형벌 또한 보다 엄중해져서 1841년 한 상인은 학대를 이유로 1개월간의 노동형에 처해졌다.

마침내는 1855년 1월 1일 대영제국은 유럽의 여타 국가와는 구별되게 개 마차에 대한 금지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이 법안의 발안자는 “왜 이 나라의 개들이 메트로폴리스의 개들보다 열악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였다.

●턴스피츠에 대한 이용금지

영국의 금지법은 미국에서도 제한 입법의 방식으로 이어졌다. 1866 미국 동물학대방지협회의 의장인 헨리 버그의 열렬한 논쟁 후에 뉴욕주법은 모든 개마차는 면허를 취득해야한다는 입법을 통과시켰다.

개마차의 이용금지라는 버그의 바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그 직후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졌다. “홀 파크는 한 마리,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의 혀를 늘어뜨리고 헐떡이는 지친 개들이 끄는 마차들의 거대한 집합소처럼 보인다.

그 소유주들은 면허를 취득하는데 실패했거나, 개에게 머즐을 씌워 체포되어 버렸다. 경찰단의 호위를 받으면서 6대의 마차행렬이 5번가를 내려오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

개 마차문제에 대한 그의 성공에 고무된 버그는 노동견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계속하였다. 특히 트레드밀 도그의 이용해 대한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는 1874년 뉴옥의 어느 살롱에서 사이다 프레스에서 노역하는 개를 본일이 있다. 버그는 가게 주인을 체포하여 대법원에까지 갔으나 패소하였다.(그 남자는 25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버그는 그러한 영업을 질타하고 주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항변을 하는 동안 그를 소리쳐 꾸짖었던 것으로 유명해졌다.

적어도 두 번 쯤, 버그는 뉴욕의 상점을 다시 방문해서 턴스피츠에 대한 학대를 이유로 기소하였으나, 결국 그 자리는 개 대신에 흑인 꼬마로 대체된 것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일부 상인들은 “턴스피츠 칠드런”을 고용하여 버그의 조사를 회피해 갔다.

임금은 턱없이 낮거나 아예 없었고 위험한 노동환경이 결국 어린아이들을 불구로 만들고 말았다. 불과 10년 일찍 흑인 노예가 트레드밀과 설탕제조 압착기를 돌리게 되었을 뿐이다.

개와 어린이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그 위험한 일에 내던져진 것이다. 버그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개탄을 했지만, 결국 개들의 강제 노동은 단지 또 다른 노예 제도의 형태였을 뿐이다.

●대륙에서의 마차견

미국과 영국에서의 반학대 법안의 입법에도 불구하고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에서는
마차견의 계속적인 이용을 반대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RSPCA는 1870년경 공식적인 선언을 통해 벨기에에서의 “개에 의한 수레 견인”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1886년 RSPCA는 벨기에 동물보호를 위한 왕실협회에 공문을 띄워서 “개는 역축으로서의 사용이 본성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이들 나라에서의 마차견의 전격적인 이용금지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상당한 정도의 규정을 만드는데에는 성공하였다.

그 결고로 노동견을 규율하고 보호하기 위한 검열의 실시, 면허세의 도입 등이 이뤄졌다. 1910년 벨기에에서도 견마차를 금지하는 법안이 입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법률은 허점과 예외 투성이여서 노약자에 대한 예외규정을 두는가 하면, 생계의 수단을 트랙혼드에 의존하는 이들에 대한 예외를 인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수 천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여전히 개를 마차를 끄는 일에 이용하였다.

법률에 의해 견마차에게 일정한 휴식시간이 주어졌으며, 마차는 엄격한 구조기준과 안전 기준에 맞도록 제작되고 운행되어야 했다. 벨기에 경찰은 도로가에서 짐의 무게와 마차의 장비 그리고 마구를 점검했으며, 경미한 위반에 대해서는 범칙금을 부과할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상당액의 면허세는 위협적인 관료주의와 결합하였으며, 더 이상 견마차를 이용하는 일을 포기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1차대전 때까지 목축업을 하는 이들에겐 여전히 유용한 수송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세계 1차 대전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개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피에로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게 되면서, 트렉혼드들도 가족과 재산을 꾸려 피난을 가는 사람들에 의해 노역을 해야만 했다. 1910년의 입법의 효력이 정지가 되면서, 모든 이용가능한 견마차들은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징발되게 되었다.

개들 역시 기관총, 소형 캐논, 탄약과 군량 마차 그리고 송형 앰블런스 끄는데에 이용되었다.
“그들은 무기를 짊어지고 두려움조차 표현하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개들이 빗발치는 포화에 맞아 쓰러지곤 했다.”

케이트 샌본은 1916년에 출간된 “오늘날의 교육받은 개들”이라는 그의 책에서 감정에 겨워 이야기하고 있다. 샌본은 많은 트랙혼드 2인조들이 포화속에서 마차가 진흙의 바다에 박혀 전복되었을 때 마구를 뒤집어 쓰고 죽어간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두 마리의 개중의 하나가 죽거나 군견병이 전투 도중 사망하는 경우, 살아남은 개는 적군의 자비에 운명을 맡겨야 했으며 때로는 트렉혼드 부대 전부가 소위 교전 수분만에 기관총에 의해 학살되기도 하였다. 월터 A 다이어는 다음과 같은 트렉혼드에 대한 (가상의)이야기를 전한다.

“피에로:벨기에의 개(1915)”는 트렉혼드들에게 전쟁터에서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적에게 포위가 되었다. 기관총의 폭발음이 그들의 바로 등 뒤에서 굉음을 내면서 전투의 격동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두 마리의 개가 사납게 뛰어나갔다. 적의 화기가 불을 뿜으며 총알이 등뒤에서 날아들었다. 다른 개들은 뒤를 따르며 으르렁거리며 혼란을 일으키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앞다투어 달아나는 것 뿐이었다.

트렉혼드들 보다 빠른 탄환하나가 어린 개의 몸에 적중을 하였다. 피에로의 발 위로 쓰러져 죽었다. 소총병들은 이내 독일군에게 포위가 되었고 마구를 쓰고 있던 개들은 총검 아래 무참히 죽어갔다. 총으로부터는 달아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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