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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리 옹호론/톰 레이건
동보연 2011-12-30 21:27:15


동물권리옹호론

/톰 레이건(Tom Regan)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철학과 교수)

왜 채식주의가 의무인가

동물이 고통을 당하지 않을 권리는 언뜻 봐서는 절대적인 권리는 아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 권리의 침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동물은 도덕적 주체가 아니므로 죄에 대한 처벌, 또는 범죄예방을 이유로 그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물은 '죄없는 위협'이 되기도 하고, '죄없는 구실'로서 이용되는 일도 있는데, 이 경우 죄 없는 자의 권리도 침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동물의 권리도 예외는 아니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가축에 가해지는 해(예를 들어 집약적 사육방식에서의 여러 가지 권리의 박탈)의 경우에는 이들 동물이 죄 없는 위협이 되기도 하고, 죄없는 보호물이라는 어려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가축에게 가해지는 해가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려면, 우리는 먼저 이들 동물이 어떤 위협도 없고 어떤 보호물도 없다고 상정할 때, 어떻게 하면 동물에 대한 가해를 가장 훌륭히 옹호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자유의 원칙

예를 들면, 권리론은 죄없는 자에 대한 가해도 포함하고 있으나, 우리가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개인이 일정한 제한 하에서 필요한 행동을 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일정한 제한이 필요한 이유는 명백하다.

예를 들면, 이웃사람의 벤츠를 빼앗지 않으면 내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그 차를 뺏을 권리가 내게는 없다. 사실, 적당한 조건을 붙이지 않으면 개인의 이런 권리선언은 도덕적 무정부상태로 가는 벤츠가 되고 만다.

[당사자 전원이 존경심을 가지고 다루어, 특별히 문제 삼을 것이 없다고 생각되면, 어떤 죄 없는 사람이라도, 예를 들어 그것이 죄 없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된다고 해도, 불편해지기 않기 위해 권리행사를 할 수 있다.]

"특별히 문제 삼을 것"이라는 단서 조항은, 내가 이웃사람의 벤츠를 빼앗지 않으면 내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그 차를 빼앗을 자유를 가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차이고 그 차가 정당하게 취득되었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가 입지 않은 해를 받지 않을 권리가 그에게도 있다.

또 그가 부가적인 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고려해야 할 특별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사자 전원이 경의(敬意)를 가지고 다루어"라는 조항은 다음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어느 날 밤 존 숙부를 괴롭히는 쾌락을 삼가면 내가 존 숙부보다 불편해진다고 해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권리행사란 이름으로 그것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단지 쾌락을 얻으려는 이유에서 숙부께 해를 끼치는 것은 마땅한 존경심을 표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권리는 도덕적 무정부상태로 가는 벤츠가 아니라, 중요한 조건들이 수반되며, 그 조건들은 권리론에 의해 승인되고 정당화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권리를 가졌다고 하는 의미는, 우리들한테는 그 권리가 승인되는 선에서 행동할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또 그렇게 행동할 자유가 있다고 하는 의미는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락된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그 자유를 거부할 수도 있으며, 거부할 경우 의무가 정확히 요구하는 이상의 것(즉, 의무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만약 불편함을 피하려고 위의 조항에 따라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나는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다른 당사자는 불편함에 빠뜨리도록 스스로 자초한 결과가 된다.

나는 물론 이렇게 해도 상관없으나, 그렇게 할 권리가 내게는 없으며, 또 누구라도 내게 그렇게 강제할 권리는 없다.

자유의 원칙은 존중의 원리로부터 도출된다. 고유의 가치를 가진 개인으로서 나는 항상 존경심을 가지고 대우 받아야 한다. 따라서 내가 단순한 용기(容器), 또는 다른 사람의 이해와 관련해서만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평가되거나 대우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도덕적 주체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도적적 규범 하에서는,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다.

만일 내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 다른 사람의 사정이 악화된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그 자유를 부정하면, 내게 마땅한 경의를 표하지 않은 것이 된다. 즉, 공평하게 보고 내가 받아들여야 할 대응은 다른 개인과 집단에 미치는 영향 여하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는 이런 것에 의해 고려해야 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이 집단적(내지 집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에 달려 있다는 사고방식은, 나는 단지 용기(容器)로서의 가치밖에 갖고 있지 않다고 상정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것이다.

내가 고유의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서, 존경심을 갖고 대우 받아야 할 '내' 권리는 '다른 누구와의' 이해관계에 달려 있지 않으므로,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가 다른 특정 개인과의 이해관계에 달려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도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만일 전체 당사자가 내 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유로, 내게 불편해지지 않는 것 이상의 필요한 행위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내게 마땅한 존경심을 표하지 않은 것이 된다.

더욱이, 자의적이 아니라 지성(知性)에 의해 생활주체로 간주되는 모든 개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일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즉, 그 개인이 단순한 용기(容器)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다른 사람과의 이해관계에서만 가치를 지닌 존재로 당연시되는 그런 입장에서 그 또는 그녀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누구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유의 가치를 지닌 모든 사람은 자유의 원칙이란 조항 하에서, 예를 들어 그것이 죄 없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행위를 수반하고 있어도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할 권리를 갖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은, 이 권리를 행사하는 당사자가 직접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 한하는 것은 물론이다.

<갑>이 <을>에게 해를 입히고 있을 때, 만약 <갑>이 <을>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면 내가 <을>보다 불편해지면, 내가 <갑>을 지지해도 자유의 원칙의 다른 조건이 충족되고 있는 한, 자신의 권리 범위에서 행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자신의 권리가 미치는 범위에서 행위 하지 않으면, 그 결과 스스로 불편함에 빠지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선택할 의무는 없으며, 해를 입는 사람, 즉 <을>도 내게 <갑>을 지지할 권리를 행사하지 말라고, 불편함에 빠질 선택을 하도록 요구할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해서, 존중(respect)의 원칙, 해(harm)의 원칙, 최소침해(miniride)의 원칙, 불편함(worse-off)의 원칙과 아울러, 권리론의 제5원칙으로서 자유(liberty)의 원칙이 인정된다.

이 원칙은 인간의 소비를 위해 가축을 사육, 소비하는 것을 옹호하려는 시도에 가장 공헌하는 것 같다. 왜냐 하면, 농장주도 고기를 먹는 사람도 자유의 원칙이 허용하는 바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이 동물에 대한 해, 그리고 동물을 해하는 자에 대한 지지를 수반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과정에서 해를 입을 어떤 개체 즉 가축보다 불편해지는 이상, 가축을 사육하고 소비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저마다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 경우, 당사자인 많은 동물에 가해지는 해를 '집계'함으로서 농장주와 육식자가 제각기 권리행사를 부정하려고 하면, 농장주와 육식자를 단순한 용기(容器)처럼 대우하는 것이 된다. 권리론의 사고방식에 입각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결정하려고 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소비를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농장주도, 소비자도, 다른 사람이 고기를 먹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 자신들이 고기를 생산하거나 먹는 일은 자신의 권리범위 안에 있으며 아무 잘못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권리론은, 이 결과를 도출한 원칙의 타당성은 인정하지만, 결론은 부정한다. 동물을 식용으로 사육하거나 먹거나 하는 일이 자유 원칙의 요구를 만족시킨다고 할 수 없다면, 지금의 논의는 어떤 면에서는 논리적이다. 하지만 문제를 보다 엄밀하게 검토하면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유의 원칙에 호소함으로써 가축에 대한 해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고려해야 할 문제 중 몇 가지는 소비자가 고기를 먹지 않으면 몸에 해가 온다고 추정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동물의 고기는 맛있으므로 고기를 끊는 것은 어떤 종의 먹는 즐거움을 막는 것이 된다.

2.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은 개인적으로 가치있는 일이며,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선택하면, 자기자신에게 그 이익을 금하는 것이 된다.

3. 육식은 아마도 개인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우리들의 관습이며 편리한 것이다. 육식을 끊는 것은, 금단에 의한 고통과 불편을 참는 것이 된다.

4. 고기는 영양이 풍부하며 먹는 것을 막으면 건강을 해치든지, 적지 않게 치명적인 건강상의 위험을 당하게 된다.

다음은 육식산업 관계자와 관련해 고려에 넣어야 할 문제다.

5. 일부의 사람들(농장주, 식육처리업자, 판매업자 등)은 가축사육을 계속하는 것에 강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의 질이나 그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질 모두, 현재의 식용가축시장의 유지와 물질적으로 묶여 있다.

6. 직접, 축산업에 관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국가도 축산업의 유지와 성장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7. 가축은 법적 재산이며, 농장주의 소유물이다. 그 이유는 농장주에게 자신의 가축을, 예를 들어 그것이 가축으로서는 유해해도, 희망대로 다룰 권리가 있다.

8. 일부 가축, 특히 닭과 칠면조에게는 여러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뒤에 다시 설명). 따라서 농장주는 권리론이 규정한 여러 원칙에 따라 이들 동물을 배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다루어도 좋다(같은 이유로 소비자는 이들을 자유롭게 먹어도 좋다).

이상의 고려해야 할 문제에 의해 가축에 대한 가해가 어느 정도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법적 재산으로서의 동물

아마도 여기까지 오면, 농장주가 동물을 '소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축은 그들의 법적 재산이다라는 사실이 문제를 모두 예외로 만든다고 하는 반론(위의 제 7항)이 제기될 것이다. 내가 내 집 벽을 무슨 색으로 칠하든, 내 집을 팔든 말든, 집이 내 재산인 이상, 그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농장주가 자신의 가축으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다. 왜 가축은 '그의 재산이므로' 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일까. 누구라도, 자기가 자신의 집의 벽을 칠하고 싶거나 집을 팔고 싶을 때, 그 권리를 부정하는 자는 나의 재산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장주가 자신의 가축을 다루는 방법에 제한을 두려 하는 것도 그의 재산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가 된다.

이 방향의 논의에는 두 가지 답변을 준비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첫 번째는, 현재의 가축의 법적 지위가 농장주의 재산인 것을 인정해 재산으로서의 그 법적 지위는 변경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동물을 다루는 방법에 법적인 제약을 가하는 것이 꼭 농장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재산권은 절대적인 권리는 아닌 것이다. 내 집의 벽을 무슨 색으로 칠할지는 자기 자신의 문제지만, 내 재산을 어떻게 취급할 지의 선택은, 취급방법에 따라 악영향이 미칠 경우,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교외의 분양지에 사는 나는 내 집을 성인취향의 책방이나 카지노, 홍등가, 또는 편의점으로 만들 수는 없다. 내 이웃들의 재산권은 물론, 여타의 권리가 내 재산에 대한 취급에 제한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축을 현재든 앞으로든, 법적 재산권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 취급을 별개로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제까지 줄곧 논해 온 것처럼, 동물에 기본적인 도덕적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면, '재산권' 행사란 이름하에 어느 농장주에게나 허락될 행위라도, 이 권리에 의해 엄격하게 제약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권리론에서는 이것은 법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문제의 하나이며, 다수의 사람들이 이 큰 뜻에 동의한다면 개혁은 충분히 달성될 수 있으리라 본다.

두 번째로,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서, 가축을 법적 재산권으로 계속 간주해야 한다는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축을 그런 존재로 여기는 한, 우리들이 그들을 법적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은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 결정적인 문제를 되돌려 보면, 법이 어떻게 자의적이 될 수 있는지를 법의 역사는 너무나 충분히, 그리고 너무나 고통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남북전쟁 전 미국에서는 노예가 된 인간을 법적 인격체로 여기지 않았다. 동물에게 현재 이 지위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지성(知性)에 따라 그 지위가 있다고 간주하지 못할 이유도, 그 지위를 부여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만일 우리들의 선조들이 인간 노예에 대해 그와 같은 가정을 했다면, 이 사람들의 법적 지위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동물을 법적 인격체로 보자는 요구에 대해 나올 수 있는 그들의 대응을 여기서는 한 가지만 검토해 보자. 현재, 그 생계가 축산업과 결부되어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론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일 가축이 재산으로 간주될 수 없게 되면, 농장주에게는 가축을 사육하고 싶다는 경제적 유인과 법적 보호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농장주는 확실한 수입원을 축산업 이외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가축의 수는 확실히 줄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권리론이 어째서 비생산적인 주장인가를 지적하는 반론에 관한 것이다:

권리론은 가축의 보호를 칭찬하는데, 만약 그 주장대로라면, 궁극적으로 상업적 이익을 위해 가축을 사육하는 농장은 소멸하고 만다. 보호를 칭찬할 대상 동물들이 어디서나 없어져 버리는데 보호를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 반론은 권리론을 가축에 적용하면 그 궁극적인 도달점이 무엇이든 자멸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혼란의 산물이다. 권리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축산업의 전면적인 해체라는 사실이다.

또 권리론에 의해 현행 축산업이 가축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재판되고 있는 이상, 그 목적에 먼저 놀랄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권리론은 가축의 절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요구하는 그런 가축의 처우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그 어떤 사업도 이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가축을 이 세상에 존속시키기 위한 유인은 실패한다. 하지만 이들 동물은 재생 가능한 자원이라는 사고방식이 배후에 자리잡고 있고, 확실히 이런 유인은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으므로, 그 손실은 유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해야 할 일이다.

더욱이, 반증은 무수히 많지만, 인간은 때때로 경제적 이유 이외의 동기에서 행동한다. 그러므로 가축사육이 경제적 이익을 낳을 수 없는 날이 온다고 해도, 이들 동물이 어디서나 사라진다고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확실히 가축의 수는 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도덕적 잘못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진보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권리론은 각각의 가축의 생활의 질이 논리적, 혹은 인과적으로 그 수의 많음과 결부되어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으며, 그런 암시도 하고 있지 않다.

이런 사고방식을 각각의 인간 생활의 질에 결부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동물의 경우도, 우리가 다르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생활주체인 동물에 대한 권리론의 견해에 따르면, 일부 가축, 특히 닭과 칠면조는 포유류가 아니므로, 권리론이 규정하는 모든 원칙의 적용범위에 들어 있지 않다는 비판(위의 제8항)이 제기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다른 농장주한테는 권리론의 비난이 들어맞아도 가금업자한테는 그것을 면한다는 제기가 가능하다. 이 가금산업 옹호론은 생활주체로서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동물과 만족시키지 못하는 동물 사이의 구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가축을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취급하는, 우리들의 문화적 관습이란 보다 큰 의미 안에서는 가금산업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면, 포유류 이외의 동물을 과학적으로 이용하거나 수렵 대상물로 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결점이다.

이런 유형의 논의에서는 권리론으로부터 여러 중요한 이론이 중복되어 나오므로, 가금산업 옹호론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과학 분야에 포유류 이외의 동물을 이용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론을 가지고 답하고자 한다.

채식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동물의 권리

채식주의의 도덕적 근거로서, 권리론과 공리주의가 제시하는 것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이제 명확해질 것이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어떤 행위 또는 규칙의 결과로 인해 영향 받는 전체 당사자의 이해(선호 또는 쾌락)를 고려해, 이해관계를 동등하게 계산했다고 하면, 정의가 성립되게 된다.

그 결과로 인해 영향 받는 전체 당사자의 선(예를 들면, 쾌락)과 악(예를 들면, 고통)의 균형이 최선의 선에서 조절됨으로써, 어느 한 개체에게 중대한 해가 일어날 수 없으면 불공정한 해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자로서는 공장축산에 있어서 가축들이 감내하고 있는 피해도 포함해, 가축에 대한 가해가 정당화될 수 있을 지의 여부는 '해답이 아직 내려지지 않은 문제다.' 집계의 결과가 '만약 최선이라면' 그 가해는 정당화되는 것이다.

가축에 해를 가하는 것에 대한 공리주의적 반대론의 효력은, 집계되지 않은 것을 사실로써 얼마큼 설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공리주의자는 관련 사실을 입수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1) 가축에 해를 가할 경우, 모든 결과를 놓고 볼 때, 전체 당사자들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가, 그리고 선(예를 들면, 선택의 만족)과 악(예를 들면, 불만족)의 균형은 어떤가,

(2) 우리들 모두가 즉시 또는 조금씩 채식주의자가 되는 경우, 모든 결과를 놓고 볼 때, 전체 당사자들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가를 서술한 다음,

(3) 모든 것을 놓고 볼 때, 후자의 귀결은 전자의 귀결보다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채식주의가 의무라는 공리주의적 근거에 대해, 이 의무를 공리주의적으로 검토하는 데 필요한 사실이 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채식주의가 의무라는 공리주의적 근거는, 결국 강제력이 대단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고기 구매를 거부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는 내 행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행위를 할 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공리주의자들은 상기하길 바란다.

결국 공리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기 구매를 거부한 결과, 해를 당하는 가축의 수가 줄고 가축이 받는 해의 정도가 가벼워질 때, 처음으로 나는 올바른 일을 한 것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 수는 없으나, 아직 공리주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공리의 원칙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채식주의에 대한 생각을 공평하게 반영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리주의가 실패할 때 권리론은 성공한다. 내가 공리주의적 요구에 부응해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할 지에 달려 있지 않다.

또 축산업을 계속 존속시키는 사람의 많음과, 한 개인의 자제력에 따라 결과가 바뀔지 어떨 지의 여부, 예를 들어 그것에 의해 얼마큼 많은 동물이 공장축산의 학대로부터 벗어날지, 또 결과에 차이가 생기면 언제, 어느 정도로 생길까 등등이 불분명하다고 해서, 자신의 방침을 굽히는 채식주의자는 없다

(개인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산업의 제품을 사지 않는 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같은 일을 할까와는 상관없이 옳은 일이다.)

그리고 축산업에 대한 반대론은 권리론에 의하면, 당사자와 다른 어떤 개인이 공장축산을 거부 또는 인정하는 것은 전체 당사자에 미치는 영향의 좋고 나쁨의 총합적 균형을 알고 있는지의 여부에 의해 주장되기도 하고 철회되기도 하는 것은 아니다.

축산업은 일상적으로 이들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으므로 앞서 말한 이유로 해서, 그 제품을 사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이 바로, 권리론에 있어서 채식주의가 도덕적 의무가 되는 이유다.

또한 그 사고방식에 입각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근대적 공장축산 따위의 상업적 축산이 전면적으로 해체되지 않는 한, 이것이 충족될 수 없다고 하는 이유인 것이다.

절멸 위기에 처한 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권리론은 개체의 도덕적 권리에 대한 사고방식이다. 생물종은 개체는 아니지만, 권리론은 종의 도덕적 권리가 생존권을 포함해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권리론이 인정하고 있는 것은 우선은 개체가 해를 당하지 않은 권리이며, 그런 까닭에 우선은 개체가 죽음을 당하지 않을 권리다.

어느 동물 개체가 그 종에서 남은 최후의 성원에 포함된다는 것은 그 동물에 어떤 권리도 부여되지 않은 것이고, 그 동물이 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는 그 권리를 갖는 다른 모든 동물과 공평한 중요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어떤 예방적 상황에 있어서, 절멸 위기에 처한 종의 최후의 두 개체와 개체수가 많은 종에 속하지만 죽음의 위협이 앞의 두 개체보다 언뜻 보다 큰 하나의 개체 가운데 한 쪽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권리론은 후자의 한 개체를 구할 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이러한 사례에서는 숫자는 어떤 차이도 가져오지 못한다. 두 개체가 속한 종의 최후의 1000 개체나 100만 개체와의 사이에서 이 선택을 할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같은 것이다. 이들 개체에 대한 작은 피해를 집계해도 이들 개체 가운데 어떤 개체도 앞의 한 개체에 미치는 해에 필적할 만한 해를 갖고 있지 않다.

그 밖의 이해당사자의 손해를 집계한 경우(예를 들어 인간의 미적 이해와 과학적 이해)에도 이 선택은 바뀌지 않는다. 이런 손해를 집계해도 우리들의 앞의 한 개체의 권리를 침해할 선택을 한 경우, 어떤 개체도 그 한 개체에 미치는 해에 필적할 만한 해를 갖고 있지 않다.

권리론은 절멸 위기에 처한 종을 구하려는 노력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다만 그런 노력을 할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권리론에서는 우리들이 절멸위기에 처한 동물종의 성원을 구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종이 절멸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자연서식지를 파괴하기도 하고 다른 나라의 동물을 밀렵, 판매해서 그 시체로 생계를 꾸리는 따위로 그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행위를 하는 자에 반대할 자격, 즉 권리를 각각의 동물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권리론은 어떤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는 어떤 시도에도 찬성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절멸 위기에 처한 종의 구성원을 지키는 노력을 지지하기는 한다. 하지만 절멸 위기에 처한 종의 구성원만을 특별히 보호하려고 하는 노력 자체는 권리론이 의미하는 바와는 상반된 정신을 조장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동물이 절멸위기 종에 속할 경우에만 동물에 가해지는 해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밖의 동물에 가해지는 해는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는 일이 된다.

이렇게 해서, 예를 들어 숫자가 많은 동물을 올가미로 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전혀 중대한 문제가 안되지만, 희귀한 동물을 올가미로 매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도록 사람들에게 촉구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권리론이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 해당 동물이 속하는 생물종의 상대적인 집단 크기만으로 그 동물 개체에 권리를 부여할지 말아야 할 지와 그 동물의 권리가 어느 때에 정당하게 침해할 수 있으며, 어느 때에 정당하게 보호될 지에 도덕적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다시, 되풀이해 보자. 권리론은 절멸 위기에 처한 종을 구하는 노력에 무관심하지는 않다. 권리론은 이런 노력을 지지한다. 그렇지만,권리론은 이들 동물 수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우리들도 포함해 모든 고유의 가치를 갖는 자와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경의를 갖고 대우 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노력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들이 단순한 용기(容器)가 아니라면 우리들의 이용하기 위한 재생 가능한 자원도 아니므로 그들의 각각에 대해 가해지는 해는 그 결과로서 개발업자, 밀렵꾼, 그 밖의 이해를 갖는 제3자가 얻는 다양한 이익을 집계하는 것만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절멸 위기에 처한 종의 상업적 착취가 잘못인 이유는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지, 그 종이 절멸 위기에 있기 때문은 아니다. 권리론에 있어서는 개체수가 많은 동물종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똑같은 원칙이 희귀종 또는 절멸 위기에 처한 동물종에도 적용된다.

더욱이, 문제의 동물이 야생동물이든 사육동물이든 역시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권리론은 희귀종 및 절멸위기종과 야생동물 전반을 다루는 인간의 미적, 과학적, 종교적, 그 밖의 이해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것들을 인정하는 것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권리론이 부정하는 것은

(1) 이들 동물의 가치를 인간의 이해를 집계하여 환산가능 내지는 교환 가능하다고 간주하는 것

(2) 이들 동물을 개체수가 많은 동물보다 우선해서 구해야 한다는 문제를 포함해, 그들을 다루는 방식을 개별적으로든 집합적으로든 인간의 이런 이해관계를 따져서 결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점은 동물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고 어떻게 다루면 안 된다고 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구분해서 희귀 또는 절멸 위기에 처한 동물에 대한 해는 어떤 것이든, 그것이 만일 인간 이해의 총계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권리론에서는 잘못된 일이다.

왜냐면 그것은 각각의 동물이 경의(敬意)를 가지고 대우 받아야 할 권리에의 침해이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에 대해서 권리론이 권고하는 일반지침은 '그대로 두라'(Born To Be Wild)이다.

거기에는 희귀 또는 절멸의 위기에 처한 종을 위협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인위적 간섭(자연서식지의 파괴 방지와, 보다 무거운 벌금과 금고형에 처하는 엄한 수렵대책 등)의 강화가 필요하므로 권리론은 그 종들이 경의(敬意)를 가지고 다루어지는 한, 이런 간섭을 시인한다. 너무 약해서는 효과가 없는 것이다.

권리와 환경윤리에 대해서

앞서 다룬 바와 같이, 권리에 기초한 환경윤리의 전개가 어렵다는 뜻이며 이제는 아주 분명할 것이며, 글을 진행하기 전에 간단히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어려운 것은 도덕적 권리의 개체주의적 성질과, 많은 환경사상가가 강조하는 [전체론적] 자연관을 절충하는 일이다.

알도 레오폴드(Aldo Neopold)는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어떤 것이 생물공동체의 통합, 안정, 미(美)를 보전하는 경향이 있다면 옳다. 반대의 경향이 있으면 잘못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제 장 참조).

이 사고방식에서는 보다 큰 생물적 선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통합, 안정, 미]라는 이름으로 개체가 희생되는 것이 확실히 예견된다. 정서적인 의미는 갖는 반면, [환경파시즘]의 개작(改作)일 수도 있는 이런 사고방식 속에 개체의 권리라고 하는 개념이 충분히 담겨 있다고 보기 어렵다.

레오폴드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면, 인간은 생물공동체의 구성원 중 하나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며 그렇다면 그 '구성원' 중 다른 '하나의 존재'도 같은 도덕적 지위밖에는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극단적이거나 부당한 것이 아닌 하나의 사례를 상정해보자.

예를 들어, 우리가 희귀한 풀을 한 포기 죽이든지, 수적으로 많은 인간을 한 명 죽이든지 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하자. 만약 그 풀이 [구성원 중 하나의 존재]로서 인간 이상으로 [생물공동체의 통합, 안정, 미]에 공헌하고 있다고 하면, 그 인간을 죽이고 풀을 살린다고 해도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 것이다.

권리론이 이런 입장에 달가워할 리 없다. 권리론은 동물 이외의 자연물의 범주에 들어 있는 것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뒤에 다시 설명).

그것은 권리를 갖는 개체에 대한 대우를 전체적인 고려에 따라 결정하는 것, 예를 들면, 무엇이 가장 [생물공동체의 통합, 안정, 미]에 공헌하고 무엇이 공헌하지 않는지를 계산한 뒤 결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개체의 권리는 이와 같은 고려에 의해 존중되어서는 안 된다(개체의 권리를 결코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환경파시즘과 권리론은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이며, 양자를 섞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권리론은 동물이외의 자연물의 집합과 생태계가 고유의 가치를 가질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어느 것이나 한 개체의 쾌락과 선호의 충족이라는 가치, 또는 개체 수만으로 그런 선(善)을 집계한 가치와는 종류가 달라서, 그런 가치로 환산할 수 없고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교란되지 않고 생태학적으로도 균형 잡힌 숲은 이런 종류의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은 확실히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수목의 집합과 생태계에 도덕적 권리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도저히 밝힐 수 없다.

어느 것이나 개체는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도덕적 권리라는 개념을 적용할 지가 불명확한 것이다. 아마도 이 곤란은 극복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 사람도 이 중요한 윤리학 분야에서 이런 논문을 쓴 사람은 없다.

모범적인 권리의 보유자는 개체다. 하지만 현대에 있어서의 환경보호의 주된 노력(예를 들어 자연 그대로의 보전)은 부분(예를 들어 개체)보다도 전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환경주의자가 [권리의 중시]를 주저하거나, 적어도 권리론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선까지 권리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환경주의자가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좀더 명확히 말해, '숲은 보고 나무는 보지 않는' 예가 될 것이다.

동물 이외의 각각의 자연물, 예를 들어 이 세쿼이어 삼나무가 고유의 가치를 가지며, 그 가치에 대해 경의를 갖고 대우받을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옹호할 권리에 기초를 둔 환경윤리가 훌륭히 전개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환경주의자로서도 즐거워할 일이다.

만일 각각의 수목이 [고유의 가치(inherent value)]를 갖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다른 존재가 가진 쾌락과 선호의 충족이라는 [본질적 가치(intrinsic value)]와는 다르며, 그것과는 환산도 비교도 할 수 없는 종류의 가치인 것이다.

그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전체 당사자의 쾌락과 선호의 충족이란 가치의 집계만을 근거로, 개체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만이 결코 전부가 아니다.

따라서, 권리에 기초를 둔 환경윤리는 예를 들어 그 진보가 경제, 교육, 휴양, 또는 인간의 그 밖의 이해관계를 집계한 것이었다고 해도, [인간의 진보]라는 이름하에 원시자연을 뿌리뽑기로 한 사람들을 저지하는 것은 보존론자가 바라던 바, 즉 "그대로 두라(Born To Be Wild)"를 이루는 일과 같다.

이런 보존을 원하는 사람들은 환경주의자들 사이에서 더 보편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전체론에 찬성하면서 권리론을 후퇴시키기에 앞서, 각각이 의미하는 바를 재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에는 중요한 것을 쓸모 없는 것과 함께 흘려 버릴 위험성이 있다.

권리에 기초를 둔 환경윤리는 아직 결승점에 도달하지 않은 선택사항이며 결코 확립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나, 앞으로 연구를 계속할만한 가치는 있다. 환경주의자가 가리키는 목표와 원칙적으로 상반된 것이라고 해서 간단히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그 공동체가 보존될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들이 생물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개체의 권리에 적절한 존경심을 표한다고 한다면, 그 공동체도 보존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좀더 전체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을 가진 환경주의자들도 바라던 바가 아닐까?
 
과학에 있어서의 동물의 이용

공리주의와 권리론의 기본적 차이는 과학에 있어서의 동물이용이라고 하는 사례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난다. 공리주의자들로서는 과학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동물에 가하는 해가 정당화가 될 수 있는지 어떨지는, 그 뒤 전체 당사자한테 돌아오는 결과의 총합적 균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만일, 동물에 해를 가했을 때 초래되는 결과가 선과 악의 최선의 균형을 가져온다면, 그 가해적인 실험은 의무가 된다. 만약 그 결과가 다른 방법에 의해 초래된 결과와 적어도 비슷한 수준에서 좋을 경우, 그 가해적인 실험은 용인된다.

그 가해적인 실험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에 따른 결과가 최선의 귀결보다도 떨어질 경우에 한한다. 따라서, 공리주의자가 동물에 해를 가하는 실험에 반대하거나 지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사실, 즉 누가 이익 또는 해를 입을까, 그것은 어느 정도일까 등등의 사실을 입수할 필요가 있다.

실험자와 연구자, 그들의 고용주, 그들의 부양가족, 도소매 정육업자, 동물번식업자, 그 밖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공평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들 이런 부차적 효과를 중요시한다.

실험동물은 어떤 특권적인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이해관계도 물론 계산에 넣어야 하지만, 그것은 다른 모든 인간들의 이해관계 이상으로 고려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늘 그런 것처럼, 공리주의자는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관련 사실, 즉 그들의 이론을 전제로 할 때, 과학분야에서의 동물이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판단하기 위해 입수해야만 하는 사실을 제시할 수 없다.

더욱이, 어떤 필요한 실험에 있어서, 실험자가 지능이 낮고 의식이 박약한 인간보다 지능이 높고 의식이 분명한 동물을 이용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경우, 공리주의자가 그것은 어딘지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시사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은 공리주의적 근거가 없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 그리고 지금까지 의견을 들은 모든 공리주의자에 따르는 한, 그런 동물을 이용하는 것의 귀결은 모든 면을 고려할 때 그 인간을 이용한 결과가 가져온 귀결보다는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자의 이론을 전제로 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이용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귀결될까 하는 것이다.

권리론의 입장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어떤 것도 단지 용기(容器)처럼, 또는 그 가치가 상대방의 잠재적 효용과 비교되어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즉 우리들은 단순히 '최선의' 총합적 귀결을 가져올지 그렇지 않을지 하는 이유만으로는 결코 개체에 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개체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과학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동물에 해를 가하는 것이 잘못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아주 현실적이나 어느 종에게는 부당한 이익이 돌아가므로, 부당하게 획득된 이익은 모두 부당한 이익인 것이다.

거기서 권리론은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식을 진보시켜 일반의 복지를 위해 힘쓸 것, 단 개체의 권리를 침해할 실천을 허용하는 일이 없이 그것을 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과학과 사회 사이에 새로운 계약조건, 이미 시기를 놓치고 있으나 동물 권리의 대변자들이 지금 서명하는 계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권리론을 인정하는 사람, 동물을 위해 서명하는 사람은 동물에 해를 가하는 그런 과학, 예를 들면 과학, 독성실험, 기초연구 등에 있어서 동물이용이 전면적으로 폐지되지 않는 한,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리론은 편애는 하지 않는다.

도덕적 주체이든 도덕적 객체이든 인권을 침해하는 과학적 행위는 용인하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이외의 동물에 대해서 이 장에서 논한 것과 유사한 이유에 의해, 다른 동물보다 지적 능력이 높다고 볼 수 없으나 권리를 갖는다고 해석해야만 하는 인간, 즉 신생아와 태아에 대해서도 이것이 적용된다.

권리론을 인정하는 사람은 어떤 과학 종사자들이라도 이들 자원(?)에 접근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들이 잔혹성에 반대하기 때문도 친절함에 찬성하기 때문도 아니라, 정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요약과 결론

이 장에서는 권리론이 의미하는 몇 가지 사항을 밝혔다. 권리론의 사고방식에 입각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축산업은 부공정한 것이며, 불공정하다는 이유는 마땅히 경의(敬意)를 갖고 대우하지 않으며, 인간의 이해와 관련해서만 가치를 갖는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축산업은 잘못되어 있으며, 그것은 가축이 공장축산방식으로 협소한 곳에서 구금 사육되고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도적으로 사육되지 않는 경우에도 똑같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도 그들은 호감에 따른 존중이랄지 온정적인 안락사라는 발상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득실 때문에 일상적으로 너무 일찍 생을 마치기 때문이다. 고기를 구매함으로써 현재의 축산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그만둘 도덕적 의무가 있다.

소비자가 채식주의자가 되면 관련 동물들보다 소비자 쪽이 불편함에 빠진다고 하는 주장에는 전혀 신뢰할만한 근거가 없다. 또 현재의 생활의 질이 축산업의 활력에 달려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산업이 쇠퇴하면 불편함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이 업종에 자발적으로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업종이 쇠퇴했을 때 불편함에 빠지는 것을 피할 권리를 포기하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들은 어떤 농장주, 정육출하업자, 판매업자에 대해 또 그들의 부양가족에 대해, 그들의 제품을 사줄 의무는 갖고 있지 않다.

더욱이, 가축 사육으로의 적당한 경제적 유인이 없어지면, 상업적 이익 때문에 사육되는 가축은 (남는다고 해도) 몇 마리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은 권리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은 각각의 동물이 어떻게 정당한 대우를 받을까 하는 것이지 가축이 얼마큼 존재할까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축은 법적 재산인 이상, 그 법적 소유자가 좋다고 생각하면 어떠한 방법으로 다루어도 상관없다는 반론은 첫째, 합법적이나 이른바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며 둘째, 권리론은 동물을 법적 재산으로 하는 개념 그 자체와는 다른 이론을 제기하고 있으므로 불충분하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이유다.

채식주의가 될 의무에 대한 공리주의적 근거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권리론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채식주의 생활를 영위하고 있는 지와는 무관하게, 또한 채식주의가 고기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까와도 무관하게, 개인에게는 채식주의 생활을 영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인이 다른 이의 권리를 침해하는 제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은, 예를 들어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한 사람뿐일지라도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채식주의를 찬양하는 공리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권리론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각각의 채식주의자들에게 단순히 육식을 끊는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권리론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축산업이 전면적으로 해체되지 않는 한,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포츠로서 혹은 상업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사냥과 덫 놓기는 권리론의 시각에서는 어느 쪽이나 철저히 비난을 받는다. 이들 스포츠로부터 얻을 수 있는 쾌감(예를 들어 자연과의 교류)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야생생물의 상업적 착취는 야생동물의 가치가 인간의 이해, 특히 경제적 이해에 관련된 효용으로 환산할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전제에 입각하고 있다.

이런 비판을 [최대지속생산량(Maximum Sustainable Yield)]의 철학으로 모면하려고 하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최대지속생산량이란 어업에서 쓰이는 개념으로 자원을 손상하지 않고 해마다 지속 가능한 최대 생산량(어획량)을 말한다.

이 철학은, 야생동물은 재생 가능한 자원이며, 인간의 이해와의 관련만으로 가치를 갖는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고착시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최대지속생산량의 철학을 철두철미하게 실행해 왔다고 할 때 남아 있는 동물의 총수와, 굶주림과 사냥꾼과 싸운 결과 [잔혹한 죽음] 쪽을 택한 동물의 총수는 실제로는 어느 쪽이나 감소한다.

스포츠와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냥과 덫 놓기를 행하는 자는 최대지속생산량의 철학을 실천함으로서 야생생물에 단 한 가지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며 [야생생물의 친구]가 아니다. 권리론은 일반적으로 야생생물은 그대로 두라는 입장을 취한다.

야생생물의 관리는 야생생물을 도덕적 주체인 각종 사냥꾼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계획되어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는 온갖 야생동물산업(예를 들면 모피산업과 고래잡이)의 해체와 함께, 합법적인 수렵 및 덫 놓기 전통도 폐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모범적인 권리의 보유자는 개체이므로, 그것이 희귀종 또는 절멸위기종에 속했다고 해서 그 이상의 어떤 권리도 부여되지 않는다. 따라서 권리론은 이들 종의 구성원에 대해 어떤 특권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권리론은 희귀종 또는 절멸위기종을 구하는 노력에 반대하지 않는다. 권리론은 다만 이들 동물이 보호되는 것은 그것이 동물이기 때문이며, 희귀종 또는 절멸위기종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할 따름이다.

더욱이, 희귀종 또는 절멸위기종을 보호하는 노력이 수적으로 많은 동물의 가치를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그런 신념과 태도를 조장한다면, 그 경우에 있어서 권리론은 강한 도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가 많든 희귀하든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권리론에서는 개체에게 중심적 중요성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찬동자가 환경윤리를 전개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미해결의 문제가 되고 있다.

적어도 이론 차원에서는, 권리론은 환경을 다루는 현대사상의 대부분을 특징짓고 있는 전체론적 내지는 체계론적 접근방식(예컨대 환경시스템)과는 상반된다.

권리론은 특히 레오폴드가 주창한 그런 집합적 의미를 갖는 이론, 즉 우리들의 행위의 도덕성을 생물공동체의 구성에 미치는 귀결의 총계에 따라 평가하고, 공동체에 의해 [최선]의 귀결을 가져오는 것은 인정하고 [최선]의 귀결을 가져오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접근방식을 거부한다.

권리론은 이와 같은 도덕적인 의지결정법과 그 기반이 되고 있는 개체의 가치에 관한 이론을 거부한다. 하지만 실천 차원에서는 권리론이 의미하는 바는 특히 야생자연(野生自然)의 보전에 관해서는 환경주의자가 옹호하는 대의(大義)와 충분한 조화가 가능하다.

권리에 기초를 둔 환경윤리는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으며, 물론 충분한 평가도 되어 있지 않으나, 미해결의 이론적 대안으로서 이런 윤리로의 길을 남겨놓고 있다. 그 가능성은 가까이 남겨 두어야만 한다.

권리론의 주요한 의미를 다루는 최후에 채택된 분야는 과학에 있어서의 식물 이용이다. 다양한 이유에서 권리론은 동물을 교육적으로 문맥(文脈)에 이용하거나, 신제품과 의약품의 독성시험 및 연구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의 실험실에서 살아 있는 포유동물의 해부실습은 비난 받아 마땅하며, 이런 실습으로부터 얻은 관련지식은 해부를 하지 않고서도 습득 가능한 것이므로, 더더욱 강하게 비난한다.

이들 동물을 마취했다고 해서 권리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고통과 고생뿐만이 아니라 동물의 너무 이른 죽음이 도덕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와 대학의 실습에 이용되는 동물은 대부분이 포유류가 아니므로, 권리론이 찬양하는 모든 원칙의 적용범위로부터 제외된다고 하는 반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1) 생활주체인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도저히 명확히 구분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사례도 포함해 많은 경우, 우리들은 예를 들어 그것이 잘못되었더라도 신중하게 동물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2) 포유류 이외의 동물에 있어서도 그들을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포유동물에 대해서도 존중심을 잃게 되고, 이에 따라 그들의 권리를 침해할 행위와 제도의 수용과 결부된 신념과 태도를 조장한다.

이 두 가지는 어느 것이나 고등학교와 대학의 생물수업에서의 표준적인 해부실습을 중지할 유력한 근거인 것이다.

독성시험에 있어서의 동물이용에 대한 반대하는 근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동물에 대한 의존이 전제하고 있는 그런 위험성을 떠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제품이든 신약이든 개인이 그 위험성을 감수할지 어떨지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위험성을 다른 이에게 강제적으로 증명시킨다든지, 최소화시킨다든지 하는 권리를 개인은 갖고 있지 않다.

결과로서 다른 이에게 좋은 귀결을 가져올 수도(또는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독성시험의 도덕적 정당성과는 관계없으며, 비난 받아야 할 수단으로 상 받을 만한 목적을 다한 채 하는 다른 사례들과 그 점에서 똑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선(善)을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부정을 행할 수는 없으며, 위험성을 증명시키거나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이에게 해를 가져올 위험성을 강제적으로 다른 이에게 떠맡긴다든지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다.

실험동물을 이용하는 독성실험을 용인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독성실험 차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들이 만약 어떤 신제품과 신약을 이용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위험성을 최소화한 것이 바람직한 이상, 권리론은 이 점에 대해 우리들의 이익을 보호해줄 타당한 과학적 실험절차의 개발을 칭찬한다.

또한 상업적 이해관계와 그 영향을 받은 정부의 규제기관에 대해 가정과 직장에 있어서의 사람들의 보호에 대해 양심적인 대화를 할 것을 요구한다.

권리론이 금지하는 것은 개체의 권리를 침해하는 조처다. 필요한 것은 동물수의 소멸도 세련된 실험절차도 아니다. 권리론은 독성실험에 있어서의 동물이용의 전면적인 폐지를 요구한다.

연구를 위한 동물이용에 대해서도 권리론은 같은 것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뭔가가 개발될지도 모른다고 해서 동물에 해를 가하는 것은, 그들 동물을 마치 그 가치가 다른 사람의 이해와 관련된 잠재적 효용으로 환산하듯이 다루는 것이다.

또 적잖은 동물들, 엄청난 수의 동물들에게 그런 대우를 하는 것은 그 영향을 받는 동물을 마치 재생 가능한 자원처럼 취급하게 된다

(재생가능이란, 결국 교환해도 아무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자원이란, 결국 다른 사람의 이해와 관련해 잠재적 효용을 갖는 것에 가치를 둔다는 뜻이다).

권리론은 연구를 위한 가해적인 동물이용을 증오하며, 그것의 전면적인 배제를 요구한다.

동물은 다른 사람의 이해와 관련한 효용과는 다르며, 그것에 환원시켜서도 그것과 비교해서도 안 되는 종류의 가치를 지니므로 정의라는 엄격한 견지에서 보면 그들은 그런 가치에 대해 경의(敬意)를 가지고 대우 받아야만 한다.

연구를 위해 일상적으로 실험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이들 동물에게 마땅한 경의를 가지고 대우하는 것이 아니므로 연구를 위한 동물이용은 불공정하며, 따라서 잘못이다.

인간과 동물, 쌍방을 위해 획득되는 여러 가지 진정한 이익을 포함해 상받을 만한 과학적 업적도 불공정한 수단에 의해 획득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 사례에서도, 권리론의 과학연구의 중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연구는 계속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단, 실험동물의 희생에 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학연구 전체에 부과되는 과제는 독성학 및 그 밖의 모든 면에서의 과학적 노력에 대한 과제와 똑같이, 즉 인간이든 동물이든 어떤 이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는 과학을 행하는 것이다.

권리론은 과학연구를 포함해, 과학에 있어서의 포유류의 배(胚) 이용이 정당화되는 경우(예를 들어 희귀종 및 절멸위기종의 번식 등을 위해-엮은이 주)도 있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권리론의 사고방식으로는 발달의 초기단계에 있는 태아의 이용을 허용하는 것이, 번식 모체인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으므로 이용해도 상관없다.

이 요구가 만족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만약 해당 과학자가 포유류의 배(胚) 및 성숙한 동물 양쪽을 계속 사용한다고 하면, 분명히 이 요구는 만족될 수 없다.

즉 해당 과학자가 성유한 포유동물(혹은 한 살 미만이지만 유리하게 해석해야만 할 포유류)은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포유류의 배아 이용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증거로써 없어서는 안될 요소다.

이처럼, 해당 과학자가 배의 발달을 이룬 뒤의 포유류의 이용을 금지할 때, 권리론은 비로소 포유류의 배아의 이용을 옹호하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불가능하다. 그 증거를 보여줄 책임은 배아의 이용자 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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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게는 고통을 피할 권리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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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다른 세상 | 2006/04/05 (수) 08:33

동물에게는 고통을 피할 권리가 없는가?

대체실험, 왜 포유류 대신 어류를 사용할까?

요즈음에는 물고기를 실험동물로 이용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왜 일까. 어류는 포유류에 비해 고통을 기억하는 시간이 극히 짧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최소화하는 이른바 ‘3R’ 원칙에 다가서려는 노력이다.

3R 원칙은 영국의 과학자 러셀과 버크가 제시한, 동물실험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윤리다. 3R이란 동물실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체(replacement)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동물실험 횟수를 줄이고(reduction),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refinement)해야 한다는 대안 원칙이다.

고등동물 대신 하등동물을 써서 동물이 지각할 수 있는 고통을 줄이거나, 통계적 기법이나 새로운 실험환경을 도입해 실험 횟수를 줄이는 방식, 세포·조직 연구로 대신하는 노력 등이 모두 3R 원칙에 따라 행하는 대안 연구다.

이런 3R의 취지에 공감해 서울대 수의대의 한 연구팀은 제브라피시(잉어과의 대표적인 관상어)를 이용해 암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실험방법에도 원론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물고기도 엄연한 생명체이며, 물고기가 고통을 느끼는지, 느끼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객관적 규명이 미흡한 상태다. 그러나 어류는 포유류에 비해 고통을 기억하는 시간이 극히 짧은 것만은 사실이므로 제브라피시를 이용한 암연구를 폄하할 수는 없다. 사실 국내에서는 이러한 대체실험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동물의 권리가 그만큼 무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 일본은 2006년 8월, 세계 동물실험 대체법 연구자들이 모이는 ‘제6차 생명과학에서의 동물이용과 대체법에 관한 세계 과학자 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의 의장인 야수오 오노 박사는 말한다.

“예전엔 일본에서도 불필요한 동물실험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물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해선 안 된다. 이를테면 중추신경계 관련 약물의 안전성을 검증할 때, 굳이 영장류를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배양세포에서 검사해도 충분하다. 또한 될 수 있으면 하등동물을 쓰고, 동물실험을 할 수밖에 없을 때는 마취약을 쓰는 등 고통을 경감시켜야 한다. 대학은 문부성 규정에 따라 동물실험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기업에는 권고사항이다. 최근에는 ‘동물애호와 관리에 관한 법’ 안에 3R 법칙이 명시됐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된다.”

화장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동물실험은 안점막 실험이다. 화장품이나 샴푸·린스의 특정 성분이 눈에 들어가도 실명이나 눈병의 위험이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 실험을 한다. 일정량의 독성물질을 토끼의 눈에 투여하고 1시간, 24시간, 48시간째 경과를 확인한다.

물론 간결한 실험결과를 위해서 토끼는 결박되며 마취제의 투입도 제한된다. 유럽연합은 2009년부터 동물실험을 이용한 화장품 생산과 판매를 금지하기로 했다. 또한 2005년 11월7일에는 관련 업체와 연구자들이 모여 “화장품은 물론 화학합성물에 대한 동물실험도 금지하기 위해 이를 위한 대체실험법을 연구해 보고한다.”는 브뤼셀 선언을 발표했다.

현재 독일을 비롯해 여러 국가에서 동물 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첨단 기술들이 연구 개발 중인데, 이미 많은 경우 박테리아, 세포, 조직 등을 배양해 활용하는 실험이 동물 실험보다 더 빠르고 저렴하고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최첨단의 뢴트겐 실험 등이 활용되고 있다.

동물은 고통을 피할 권리가 없는가?

l7세기에 데카르트는 동물기계론을 제창하여, 동물체를 태엽을 감은 기계와 같이 생각한 바 있다. 그는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남긴 데카르트는 사유 능력이 없는 동물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기계나 마찬가지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물을 상대로 실험을 하거나 도축할 때 동물이 내는 비명은 기계에서 나는 삐걱거림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본능에 끌려 다니는 동물의 행동은 그저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해방』(인간사랑)의 저자 피터싱어는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동물도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므로 동물의 이익을 인간의 이익처럼 고려해야 하다고 피터 싱어는 주장한다.

동물의 이익이 윤리적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가, 대화를 할 능력이 있는가에 있지 않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 벤담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물들이 과거를 기리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나 공동체를 구성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이익이 고려되지 않아야 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피터싱어는 말한다.

피터 싱어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본적 원리가 인간의 지성과 능력이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동등한 배려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과 쾌락을 감지할 능력이 있는 존재라면 마땅히 그들의 이익이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할 때, 다른 동물도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특권적인 존재는 아니다.

『동물해방』에서 피터가 고발하는 동물들의 상황은 섬뜩하다. 가령, 축산업자는 송아지 축사를 항상 따뜻하게 해두는데, 이는 송아지의 열량 손실을 막는 동시에 땀을 흘리게 하여 더욱 갈증을 느껴 식사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또 운동량을 줄여야 빨리 살이 찌기 때문에 축산업자는 송아지가 어떤 운동도 할 수 없게 감금한다. 그렇게 해서 송아지는 하루 종일 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비육된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우유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젖소는 임신 가능해진 그때부터 5~6년 뒤 햄버거나 개 사료가 되기 위해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그날까지 줄곧 강제로 임신하게 되고 또 출산 후에는 즉시 새끼를 박탈당한다.

『동물의 역습』의 저자 마크 롤랜즈는 존 롤즈가 [정의론]에서 주장한 ‘평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을 들어 동물들의 권리를 옹호한다. 그의 논점을 요약해보자.

만약 당신이 남성이 될지 여성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면, 당신은 여성차별이 존재하는 사회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여성이 될 가능성이 50퍼센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차별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당신이 인간인지 다른 동물인지 모른다면, 미각적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거나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을 원하겠는가?

몇몇 과학자들이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실험실에서 당신을 고문하고 죽이는 상황을 원하겠는가? 당신의 털이나 가죽을 벗겨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전기충격이나 가스로 죽이는 상황을 원하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종(種)에 속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상황에 처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현실세계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의 논의방식에는 다소 비약적인 면이 있기는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버리고 동물의 입장으로 돌아가 사태를 파악한다면 그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도덕적 설득력을 갖는다. 롤랜즈의 주장은 동물도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부당한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감의 능력에 바탕을 둔 동물 윤리

우리 속담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병을 알아본 사람만이 그 병에 걸린 사람을 이해한다는 이야기다. 이 때 고통받는 사람과 그를 지켜보는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다.

공감이란 타인의 처지와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감정이다. 그것은 타자의 처지와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일체화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내것처럼 생각하는 공감의 정서는 단순히 개별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이는 철학자 흄이었다. 그는 덕에 포함된 성질들은 즐거움을 주거나 유용한 것으로, 악덕에 속하는 성질들은 혐오감을 주거나 무용한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같은 구별은 인간들에게 대부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쾌락과 고통에 대한 반응은 개별적이지만, 그 반응 능력인 도덕적 정서 자체는 인간에게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흄은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적 정서를 공감(sympathy)이라고 생각했다. 공감은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한 위대한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어서, 도덕성의 보편적 성향이나 원리로서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나는 나이고 타인은 타인에 불과하다는 데서는 어떤 도덕이나 형제애도 생겨나지 않는다. 타인도 나와 같이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데서 도덕과 형제애가 생겨난다. 타인과 내가 같을 것이라는 유사성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도덕과 형제에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그 믿음에는 ‘위대한’이란 형용사가 붙여진다.

우리는 이 공감의 원리가 없다면 우리는 수천 년 전에 행해졌던 전제군주의 악덕에 대해서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없고, 먼 나라에서 행해지는 독재자들의 횡포를 비판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흄에 있어서 공감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인식 능력이며, 도덕적 구별이나 판단의 보편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 이타행동을 촉발시키는 경향이 있다. 2004년 12월 지진으로 인한 해일 '쓰나미'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을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피해국가를 돕겠다고 나선 지방자치 단체는 마산시였다.

예산이 많아서도 아니고, 다른 행정구역보다 마산시가 종교 활동이 두드러져서도 아니다. 마산시 역시 2003년 태풍 '매미'로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픔과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동남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마산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는 시민의 행위에는 높은 수준의 윤리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불우한 이웃의 불행한 삶에 대한 공감이 있다. 공감이 있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며, 그 결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타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공감능력을 극대화시킨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도 결국 공감의 능력을 확대하라는 주문이고,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교의 불살계(不殺戒)는 자연계의 뭇생명들에게로 인간의 공감능력을 확대시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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