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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해방론/피터 싱어
동보연 2011-12-30 21:34:20

동물해방론
/by Peter Singer

출처: admh.org

최근 몇 년간 많은 압력단체들이 평등이란 주제를 가지고 활발한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고전적인 사례는 흑인을 하급민으로 취급하는 편견과 차별의 철폐를 요구하는 흑인해방운동이다. 흑인해방운동의 절박한 호소와, 제한적이나마 이들이 처음으로 거둔 성공은 다른 압력단체들의 귀감이 되었다.

우리는 스페인계 미국인, 동성연애자 등 다양한 소수집단들이 벌인 해방운동과 친숙해졌다. 다수집단인 여성들이 운동을 시작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막다른 길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성을 대상으로 한 차별은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차별 형태라고 한다.

그런데 소수 인종집단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했다고 한 동안 떠벌려 온 이들 해방진영에서조차 공공연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런 차별은 용인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유일하게 남은 차별 형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늘 조심스러워 할 것이다. 우리가 해방운동으로부터 어떤 것을 배운다면, 이와 같은 편견을 강력히 지적하지 않고서는 특수 집단에 대한 우리 자세에 잠재적 편견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깨닫기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해방운동은 우리들의 도덕적 지평의 확장과, 평등이라는 근본적인 도덕원리의 확장 또는 재해석을 필요로 한다. 자연스럽고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한 행동들이 부당한 편견의 결과인 것으로 이미 여겨지고 있다.

모든 인간의 태도는 비판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압력단체들이 지적한 것을 피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마저도 다시 생각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의 자세, 그리고 이런 자세로부터 나온 행동 때문에 가장 불편을 당하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생소한 정신적 전환을 이룰 수 있다면, 남을 희생시켜 항상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한 집단에게만 도움이 되도록 시종일관 움직이는 우리의 자세와 습관 속에서 어떤 행동양식을 찾을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새로운 해방운동의 전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내 목표는, 가장 큰 다수 집단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행동에서 정신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 가장 큰 다수집단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집단으로서, 우리가 동물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친숙한 용어인 바로 [동물]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대다수가 인정하는 평등이란 기본 원리를 인간의 모든 집단에도 확대시키듯이 다른 종에게도 확산시켜야 한다고 나는 촉구하는 바이다.

이 모든 것이 진지한 목표라기보다는 다소 억지소리로 들리고 다른 해방운동의 어설픈 모방에 더 가깝게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과거의 "동물의 권리"라는 개념은 여성의 권리를 빗대어 쓰는 데 사용되어 왔다.

현 여성해방론자들의 지도자격인 메리 울스톤크로프트가 1972년 {여권의 옹호}라는 책을 펴냈을 때, 그의 이론을 모순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며, {짐승의 권리}라는 제목의 익명의 글로써 여성해방주의자들을 풍자했다.

이 풍자의 글을 쓴 사람(실제 저자는 캠브리지대학의 저명한 철학자인 토머스 테일러)은 여성들의 지위가 한 단계 더 향상될 수 있다고 밝힘으로써 울스톤크로프트의 논리를 반박하려 했다. 풍자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것을 여성에게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개, 고양이, 말에게 이 주장을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여성해방론자들은 이 "짐승"들도 평등권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짐승들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주장은 분명히 잘못되었으므로, 그들의 논리는 근거가 박약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같은 주장을 서로 다른 문제에 적용했으므로, 짐승에게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면,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도 타당치 않은 것이 확실하다.

테일러의 주장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답변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자질 문제를 인간 이외의 동물에까지 확대시키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개는 투표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개들은 투표권을 가질 수 없다. 여러 가지 분명한 점에서, 남성과 여성은 아주 닮은 반면, 인간과 다른 동물은 크게 다르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은 같은 존재이며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과 다른 동물은 이와 다르고 동등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된다.

테일러의 주장에 대한 앞의 대응 논리는 한 가지 면에서는 옳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와 같은 차이는 각각의 가진 권리에서 약간의 차이를 낳아야만 한다.

하지만 이 분명한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이간 이외의 동물에까지 평등이라는 기본 원리를 확대하는 문제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역시 부정할 수 없으며, 여성해방운동의 지지자들은 이 차이가 다른 권리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여성해방론자들은 여성 자신이 원하면 낙태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여성해방론자들이 남성과 여성의 평등에 대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므로, 이들이 남성의 낙태권도 지지해야 한다는 것과는 뜻이 다르다.

한 쪽이 동의하지 않으면 낙태를 할 수 없으므로 남성의 낙태권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돼지는 투표를 할 수 없으므로 돼지의 투표권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성해방론이나 동물해방론이나 이런 난센스에 휘말려야 할 까닭이 없다.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평등이란 기본 원리를 확대하는 것은 두 집단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대우하거나, 또는 두 집단에 정확히 같은 권리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지의 여부는 두 집단의 구성원의 성격에 달려 있을 것이다. 평등이란 기본 원리는, 내 생각에는 배려의 평등이다.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해 같은 배려를 하는 것은 다른 대우와 다른 권리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래서, 울스톤크로프트의 주장을 풍자하려는 테일러의 시도에 대응하는 또 다른 방법이 생기게 된다. 이 방법은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 문제에 더 깊숙이 파고들어, 평등이라는 기본 원리를 이른바 "짐승"에까지 적용한다고 하는 개념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결론짓는 것이다.

인종이나 성을 대상으로 한 차별의 철폐가 마침내 설 땅을 찾는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흑인, 여성, 그 밖의 억압 받는 인간집단의 평등은 요구하면서 이간 이외의 동물에 대한 동등한 배려를 부정한다면, 그 때 우리는 불안정한 기초 위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종이든 종교든 성이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할 때, 우리가 주장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불평등한 계급사회를 유지하길 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시험을 고르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곤 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인간은 다른 생김새와 몸집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도덕적 능력, 지능, 타인의 요구에 대한 호감 및 감수성의 정도, 효과적인 대화 능력,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서로 다르다.

간단히 말해, 평등에 대한 요구를 모든 인간의 실제적 평등에 두고 있다면, 우리는 평등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부당한 요구가 될 것이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사람들 사이의 평등에 대한 요구가 서로 다른 인종과 성의 실제적 평등에 입각한다고 하는 개념에 집착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를지라도, 인종간과 이성간에는 그와 같은 차이가 전혀 없다.

그 사람이 흑인이든, 여성이든 그 사람에 대해 다른 어떤 것을 짐작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가 옳지 않다고 하는 근거인 것이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각 개인간의 차이가 존재할지라도 어떤 흑인들은 어떤 백인들보다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갖가지 능력과 재능 면에서 우월하다. 성차별주의의 반대말은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성은 남녀간의 능력에 대한 지표가 아니며, 이 점이 바로 성을 근거로 해서 차별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것은 인종 및 성차별 철폐에 대해 주장 가능한 노선이다. 하지만 평등에 대해 정말 관심을 가진 누군가가 선택할 방법은 아닌 것이다. 왜냐 하면, 그 노선을 견지하는 것은, 어떤 환경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불평등사회를 인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종 또는 성으로서보다는 오히려 각 개인으로서 다르다고 하는 사실은 계급사회, 예컨대 모든 백인의 지위가 모든 흑인의 지위보다 우월한 남아프리카 같은 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나 타당한 대응이다. 인종이나 성의 차원을 뛰어넘는 개인적 편차의 존재는 평등을 반대하는 궤변론자들에 대해 아무런 대응방안도 우리에게 줄 수 없다.

그들은, 예컨대 지능지수 100 아래의 사람들의 이익보다 지능지수 100이 넘는 사람들의 이익을 택하는 쪽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종류의 계급사회가 정말 인종이나 성을 근거로 한 차별보다 훨씬 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평등하다는 도덕 원리를 서로 다른 인종이나 성의 실제적 평등에 전적으로 적용한다면,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이런 종류의 불평등 반대를 위한 그 어떤 토대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우리가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에 반대할 때, 어느 집단의 실제적 평등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능력과 재능의 편차가 서로 다른 인종간과 이성간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다고 하는 특수 집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왜냐 하면, 이런 재능과 능력이 정말 인종 또는 성에 관계없이 인간 사이에 공통적으로 분포되어 있는지 절대적인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적 재능에 관한 한 인종간 및 이성간에는 그 어떤 가늠할 수 있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 차이는 물론 각 집단간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평균치를 취할 때 드러난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차이의 대부분이 정말 각 인종간 또는 이성간의 서로 다른 유전적 자질에 기인한 것인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차별의 결과로서 환경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결국 모든 중요한 차이는 유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경적인 것으로 판가름 날지도 모른다.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쉽게 차별을 끝내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중요한 차이가 환경적인 것에 기원한다는 믿음에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문제를 안주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이 노선을 취하는 인종차별 반대론자들은, 능력의 차이가 인종적으로 어떤 유전적 상관성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면, 어떤 측면에서는 인종차별주의를 옹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종차별 반대론자가 아직 해결이 요원한 난해한 과학숙제가 가져올 하나의 특수한 결과를 놓고 그것을 독단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그의 전체 입장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인종간이나 이성간의 어떤 선택된 재능의 차이가 일차적으로 유전적인 것에 기원한다는 것을 밝히려는 시도는 확정적이지 못했으므로, 그 차이는 주로 환경에 기인한다는 것을 밝히려는 시도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후자에 많은 기대를 걸던 지에 관계없이, 우리는 이 조사 단계에서 그런 시각이 올바른지를 확신할 수 없다.

다행히도, 이 과학적 조사가 가져올 하나의 특수한 결과에 평등문제를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유전학에 근거한 인종간 또는 이성간의 차이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증거가 어떻게 바뀌든지 유전적 설명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마땅한 대응자세는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평등이 지능, 도덕적 능력, 체력 및 기타 등등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등은 도덕적 이상이지, 단순한 사실주장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실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욕구와 이익을 충족시키는 배려의 양에 어떤 차이를 두어도 좋다고 하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강제될 수 없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원리는 사람들 사이의 어떤 실제적 평등에 관한 설명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령인 것이다.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다음의 식으로 그의 공리주의적 윤리 체계 안에 도덕적 평등이라는 필수 토대를 편입시켰다:

"한 사람에게 가치 있는 각각은 한 사람 이상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의 행동에 영향 받는 모든 존재의 이익은, 여느 존재의 이익과 동등하게 고려되고 같은 무게가 두어진다. 벤담 이후의 공리주의자인 헨리 시즈윅(Henry Sidgwick)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어느 한 개인의 이익은 우주론적 관점에서 볼 때(굳이 말하자면), 다른 어떤 사람의 이익보다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보다 최근에, 현대 윤리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동등하게 배려하는 데 작용하는 어떤 비슷한 요구를 도덕원칙의 기본 전제로 삼자는 데 상당한 의견 일치를 보여 왔다. 물론 그들은 이 요구를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하지는 않는다.

이 평등의 원칙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관심이 남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이 관심이 정확히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우리가 하는 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지도 모른다.

이것을 기초로 할 때, 인종차별 문제든 성차별 문제든, 결국 잠잠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평등의 원칙은 종차별주의 역시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이론과 조화를 이룬다. 높은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어떤 사람한테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할 권리를 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한테 인간 이외의 동물을 이용할 권리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많은 철학자들은 그 형태야 어떻든지, 이익의 동등한 배려를 기본적인 도덕원리로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가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볼 때, 그들 대다수가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종의 구성원들한테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벤담은 이것을 깨달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영국의 흑인노예들이, 우리가 지금 동물을 다루듯이 취급 당하고 있을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인간을 뺀 나머지 동물들은 횡포로 말미암아 결코 쥘 수 없었던 그들의 권리를 쟁취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프랑스인들은, 가해자의 변덕을 시정하지 않은 채 피부색 때문에 한 인간이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다.

다리의 수, 피부의 털, 혹은 꼬리뼈의 끝 모양 때문에, 감각 있는 존재가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해져야 할 충분한 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정해야 할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가? 그것은 판단능력 때문인가, 아니면 언어능력 때문인가? 하지만 완전히 자란 말이나 개가 태어난 지 하루나 일주일, 심지어 한 달이 된 어린 동물보다 더 말을 잘할 뿐만 아니라 더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비교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게 무슨 상관인가? 문제는 그들이 이성을 갖느냐, 또는 그들이 말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벤담은 어떤 존재에게 동등한 배려를 받을 권리를 부여하는 극히 중요한 특징으로 '고통감지능력'을 꼽는다. 이 능력은 보다 엄밀히 따져, 고통과(또는) 쾌락이나 행복을 느끼는 능력으로서, 언어능력이나 고등수학을 푸는 능력 따위와는 성격이 다르다.

벤담이 말하는 것은, 한 존재의 이익을 배려해야 할지, 그러지 말아야 할지를 정하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정하는 결정권자들이 우연히 잘못된 특징을 골랐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을 느끼고 사물을 즐기는 능력은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우리가 어떤 중요한 점에서 이해관계를 논하기 전에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한 초등학생이 길가의 돌을 발로 차는 일은 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다. 돌은 고통을 느낄 수 없으므로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그 돌의 복지와는 전혀 관계없다. 반면에, 쥐는 그런 일이 있다면 고통을 느낄 것이므로 고통 받아서는 안 될 이해관계가 있다.

한 존재가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배려하기를 거부하는 행동은 어떠한 도덕적 정당성도 가질 수 없다. 그 존재의 성격이 무엇이든, 평등의 원칙은 여느 존재의 고통과 마찬가지로-대략적인 비교가 이루어질 수 있는 선까지-그것의 고통을 배려하기를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감각능력(sentience)'의 유무가 왜 다른 존재의 이익에 관심을 가질 때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경계인가 하는 근거인 것이다(감각능력이란 용어는 고통감지능력 또는 쾌락이나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나타날 때 사용하는 편리한 용어다).

지능 또는 합리성 등의 특성으로 경계를 정할 때는 임의적인 방법으로 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다른 어떤 특성, 예컨대 피부색을 택하지 그랬는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다른 인종 간에 이익충돌이 있을 때, 자기가 속한 인종의 구성원들한테 더 무게를 둠으로써 평등의 원칙을 위배한다. 마찬가지로 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의 종(인간)의 이익이 다른 종의 구성원들의 더 큰 이익을 짓밟는 것을 허용한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람들 대다수가 종차별주의자들이다. 나는 지금 이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행동을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절대 다수의 인간들에게 있어, 특히 도시나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다른 종과의 가장 직접적인 접촉형태는 식사시간이다. 인간은 그들을 먹는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을 단순히 우리의 목적 수단으로 취급한다.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복지를 독특한 종류의 음식을 맛보기 위한 입맛의 종속물로 본다. 내가 의도적으로 "입맛"을 말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우리의 미각을 즐겁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양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육식을 하는 행위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동물고기 대신, 콩 또는 콩제품, 기타 다른 고단백 식물성 제품으로 만든 음식으로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단백질 및 기타 필수영양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확고히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입맛을 즐겁게 하기 위해 다른 종에게 스스로 가하는 살육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은, 어쩌면 그들을 거리낌 없이 죽인다는 사실 이상의 인간의 종차별주의에 대한 훨씬 더 확실한 지적이 될지도 모른다.

싼 가격에 고기를 먹기 위해, 우리 사회는 감각이 있는 동물을 비좁고 부적당한 조건에 그들의 전 생애 동안 가두는 고기 생산방식을 묵인한다. 동물은 마치 사료를 고기로 전환하는 기계처럼 취급되며, 높은 "전환율"을 가져오는 기술혁신은 무엇이든 쉽게 채택된다. 어느 권위자가 이 문제에 대해 말한 것처럼, "잔인성은 수익성이 멈출 때만 인정된다."

앞서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자세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먹는 즐거움 이상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동물을 먹기 위해 그들을 기르고 죽이는 행동은, 우리 자신의 사소한 이익 충족을 위해 다른 존재의 가장 중요한 이익을 희생시키는 분명한 사례인 것이다.

종차별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런 행동을 멈추어야만 하며, 우리들 각자 이런 행동을 지지하는 것을 중지할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식습관이 바로 육류산업이 필요로 하는 지원의 전부인 것이다.

그와 같은 지원에 대한 중단 결정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남부의 한 백인이 그 사회의 전통과 그의 자유 노예와 싸울 때 겪었던 일보다는 결코 어렵지 않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식습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신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던 그 노예주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특정 물질이 인간에게 안전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혹은 심한 체벌이 학습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심리학 이론을 검정하기 위해, 혹은 각종 새로운 물질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따위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종에게 가하는 광범위한 실험행위에서도 똑같은 차별형태가 목격된다.

과거에, 생체실험에 대한 논란은 전제주의적인 표현으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앞의 비판을 종종 간과했다. 단 한 마리 동물을 실험함으로써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동물실험 반대론자들이라고 해서 수천 명을 죽게 내버려두겠는가?

이 지극히 가설적인 물음에 답하는 방법은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많은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 실험자는 고아가 된 유아에 대해서도 기꺼이 실험을 감행할까? (내가 "고아"라고 말한 것은 복잡한 모성애적 감정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그 실험이 고아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그 실험자에 대해 형평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 실험자가 고아가 된 유아는 이용하기를 꺼리면서, 동물은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차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다 자란 유인원, 고양이, 쥐, 그 밖의 포유류들은 어느 유아보다도 자신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더 잘 알고 있고 더 자기관리적이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고통에는 최소한 더 민감하다.

다 자란 포유류가 갖지 못한 것을 비슷하게 또는 보다 많이 소유한다고 할만한 특징이 유아한테는 없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유아는 내버려 두면 조만간 동물 이상의 존재로 발달하기 때문에, 유아를 실험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따지려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일관성을 가지려면 태아도 유아와 같은 잠재력을 갖기 때문에 낙태를 반대해야만 한다. 실제로 피임과 금욕도 이런 이유에서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난자와 정자도 함께 놓고 볼 때, 같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이 논란은 심각하고 치유 불가능한 뇌 손상을 입은 인간 대신, 동물을 실험대상으로 선택해야 하는 근거를 여태껏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실험자는 동등하거나 낮은 수준의 감정, 의식성, 자기관리능력 등을 가진 인간을 실험에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할 때마다 자신의 종(인간)을 좋아하는 마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동물실험 결과에 익숙한 사람은, 이런 편견이 없었더라면, 과거의 실험회수가 오늘날처럼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결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그들의 고기를 먹는 행위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두 가지 유형의 종차별일지도 모른다. 이것과 비교하면, 제3의 그리고 마지막 종차별 형태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한테는 혹시 어떤 특별한 관심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종차별주의를 논하고자 한다.

철학은 그 시대의 기본 가정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숙고하는 것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믿으며, 이런 임무가 바로 철학을 가치 있는 활동으로 만든다.

부끄럽게도, 철학은 항상 자신의 역사적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 철학자들도 인간이며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모든 편견에 예속된다. 간혹 철학자들은 그 당시의 유력한 사상을 깨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궤변적인 옹호자가 되는 일이 더 자주 있다.

따라서 이 경우, 대학에서만 행해지는 철학은, 오늘날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일부 인사들의 편견에 도전하지 못한다. 그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자들은 저작을 통해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질문 받지 않을 가정만을 내리며, 그들의 말은 독자들의 안이한 종차별주의적 습관을 더욱 굳히는 경향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들의 저작을 참고함으로써 이 주장을 밝힐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의 시도는 권리 행사권의 확대에만 관심을 가진 나머지, 호모 사피엔스의 생물학적 영역을 다루지 못한다.

따라서 유아나 심지어 정신결함자는 포함시키면서 식사시간과 실험실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쓸모 있는, 동등하거나 더 높은 능력을 지닌 다른 존재들은 배제시킨다. 인간이 중심적으로 관련된 문제, 즉 평등이란 문제에만 중심을 둔 경우, 이것이 결론으로 더 적합할 수도 있다.

평등 문제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에서 한결같이 인간 평등이란 용어로 공식화되어 있다. 이 영향 때문에 철학자 또는 학생들은 인간 이외의 동물의 평등에 관한 물음을 하나의 주제 그 자체로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철학자가 기존의 믿음에 도전하지 못했다는 하나의 지적도 될 수 있다. 그래도 지금은 인간 이외의 동물의 지위에 관한 질문을 한 두 마디 하지 않고서는 인간 평등이란 문제를 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철학자들은 깨닫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앞서 말한 것과는 명백히 구분되지만, 인간이 서로 동등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능력, 재능, 또는 그 밖의 자질에 대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평등도 요구하지 않는 어떤 "평등" 의식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평등이 인간의 어떤 실제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특성들은 가장 작은 공통분모가 되어야 하나, 너무 낮춰 잡아서 그런 특성이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 때, 어느 철학자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어떤 특성 같은 것들은 인간이 아니고서는 소유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개념에 맞선다.

다른 말로 해서, 결국 이 말은, 우리가 사실주장으로서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미,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다른 종의 구성원들 역시 평등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평등은 서로 다른 종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어떤 비현실적인 면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을 하나의 전제로 간주한다면, 내가 앞서 주장한 것처럼, 평등이라는 영역에서 인간 이외의 존재를 제외시키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이 결과는 평등주의 철학자들이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들의 추론이 지닐 수밖에 없는 급진적인 결론을 인정하는 대신, 상식을 벗어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주장으로, 인간은 평등하고 인간 이외의 동물은 불평등하다고 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만족시키려고 한다.

첫 번째 예로, 나는 윌리엄 프랜케너(William Frankena)의 잘 알려진 논문, [사회 정의의 개념]을 택하고자 한다. 프랜케너는 정의를 상벌에 기초하는 것이 지나친 불평등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고 있다. 대신, 그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내놓는다.

...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대우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떤 점에서 평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과 욕구를 지니고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 이외의 동물이 갖지 못한 면에서 좋은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생활을 누릴 능력이 모든 인간한테만 있고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는 없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동물도 감정과 욕구를 지니고 있고 좋은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유인원과 돌고래, 심지어 개의 행동은 그들 중 일부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프랜케너는 그가 말한 "좋은 생활"이 "행복하거나 또는 만족스러운 생활이 라기보다는 도덕적으로 좋은 생활"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인정한다. 왜냐 하면, 생각은 좋은 생활을 즐기는 데 불필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의 사람들만이 지적으로 만족된 생활과 도덕적으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으므로, 생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평등주의자들을 도리어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프랜케너의 평등론과 단순히 인간적이 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확실히, 감정이 있는 모든 존재는 다른 어떤 삶보다 더 행복하거나 덜 불행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따라서 고려되어야 할 권리를 가진다. 이런 면에서,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는 확연한 구분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쾌락과 만족, 또는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단순한 능력에서 좀더 복잡한 능력으로 점차 움직여 가는 연속체, 그리고 두 종 사이의 일치로 나아가는 연속체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를 구분한다고 보통 생각하면서도, 인간의 평등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그 일을 해낼 구체적인 차이를 전혀 찾지 못할 때, 도덕적 괴리가 생긴다. 이를 위한 어떤 이론적 근거의 필요성에 봉착했을 때, 철학자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고유의 가치"와 같은 어마어마한 문구에 호소한다. 마치 사람(인간?)이 다른 존재는 갖지 못한 어떤 가치를 지닌 양 말하거나, 또는 인간, 오직 인간만이 "그 자체에 있어서의 목표"이며,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들은 인간을 위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라고 하는 이 차별적인 개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 즉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에까지 곧장 거슬러 올라간다.

피코와 다른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평가를, 인간은 가장 낮은 물질 형태로부터 신 자신까지 이어진 "존재사슬"에서 중심적이고 중추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하는 개념에 기초를 두었다.

이 우주관은 다시, 고대 그리스-로마 교리와 유대-기독교 교리 모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족쇄를 벗어 던졌으며 그 개념을 전혀 정당화할 필요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자유롭게 호소한다.

우리에게 "고유의 존엄성" 또는 "고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같은 인간은, 우리들이 우리들한테 너무 관대하게 수여한 작위를 거절하지는 못할 것 같으며, 그 명예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수여하는 작위를 거부하지도 못한다.

사실상, 사람들이 오로지 인간만을 생각할 때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논하는 데 너무 너그럽고, 너무 진보적일 수 있다. 그렇게 함에 있어, 우리는 노예제도, 인종차별주의, 그 밖의 인간 권리의 침해 따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비난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기본적인 면에 있어서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무지한 사람들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인간을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 가운데 하나의 작은 소집단으로 볼 때만 비로소, 인류를 높이는 것이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종의 상대적 지위를 격하시키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고유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불변이라고 가정될 때에 한해서, 평등주의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어째서 모든 인간-유아, 정신결함자, 정신병자, 히틀러, 스탈린 등도 포함-이 코끼리나 돼지, 혹은 침팬지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 번 던져 보자.

그러면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에는 어떤 관련 사실이 있느냐 하는 물음처럼 답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이 두 가지의 물음은 진짜 질문이 아니다. 고유의 존엄성이나 도덕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문제를 한 걸음 후퇴시킬 따름이다.

왜냐 하면, 모든 인간, 오직 인간만이 고유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어떤 만족스러운 변명도, 모든 인간, 오직 인간만이 소유하는 어떤 관련 능력이나 특징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다른 근거는 빈약하게 제시하면서, 존엄성, 존경 및 가치란 개념은 자주 들먹이는데,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미사여구는 주장이 바닥난 사람들의 마지막 수단이다.

모든 인간과 다른 종의 모든 구성원들을 구분할 어떤 관련 특징을 찾을 수도 있다고 아직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 나는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동물들의 의식성, 자의식, 지능, 감정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일부 인간의 존재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심각하고 치유 불가능한 뇌 손상을 입은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유아에 대해서도 생각 중이다. 그러나 한 존재의 잠재력과 이와 관련된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이제부터는 영원히 지능발달이 멈춘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을 구분 지을 특징을 찾으려는 철학자들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한 데 묶음으로써 이들 인간 집단을 포기하는 조치를 좀처럼 취하지 못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인간 이외의 동물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재고하지 않은 채, 이 노선을 취하는 것은, 우리가 사소한 이유 때문에 지능발달이 멈춘 인간에 대해 고통스러운 실험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식량을 위해 인간을 사육하고 살육할 권리를 가졌다는 사실도 뒤따른다. 대부분의 철학자에게 있어, 이 결과는,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동물을 다루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평등이란 문제를 논할 때, 정신적 결함 문제를 무시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양, 한 쪽으로 쓸어낼 수는 있다. 이것은 가장 쉬운 탈출구다. 그러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현대철학의 종차별주의에 대한 나의 마지막 인용은, 한 작가가 정신적 결함을 무시하지 않고, 또 반계몽주의적 헛소리에 호소하지 않고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의 평등이란 물음에 대담하게 맞서기로 작정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스탠리 벤(Stanley Benn)의 확고하고도 솔직한 논문, [평등주의와 이익의 동등한 배려]는 이 설명과 잘 부합된다.

벤은 상투적으로 "분명한 인간 불평등"을 거론한 다음, 평등주의의 가장 가능성 있는 원리로, 배려의 평등을 주장했다. 다른 작가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벤은 "인간 이익의 동등한 배려"만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벤은 이 동등한 배려의 제한조건을 옹호하는 데 매우 개방적이다:

... 인간의 생김새를 갖지 않는 것이 실격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개가 충직하고 영리하다고 하더라도, 개에게 인간과 동등한 잣대로 잴 수 있는 이해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괴한 감상이다....

예를 들어, 만약에 사람들이 배고픈 아기를 먹일지, 배고픈 강아지를 먹일지를 결정해야 할 때, 강아지를 선택한 사람은 누구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고, 권리의 근본적인 불평등을 인식할 수 없다고 평가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박약자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동물의 자세를 구분 짓는 잣대인 것이다. 정신박약자와 이성적인 사람의 존엄성 또는 인격을 동등하게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익을 동등하게 배려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는, 어떤 복지기준의 고려 요구에 상응한 진정한 배려를 각각의 이익에 부여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정신박약자가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배려의 근거에 대한 벤의 주장은 일견 옳게도 보이지만, 어째서 개와 정신박약자 사이의 요구에 어떤 근본적인 불평등이 존재해야만 하는가? 벤은, 만약 동등한 배려가 합리성에 달려 있다고 본다면, 우리가 현재 개나 기니픽을 실험용으로 쓰듯이 정신박약자를 이용하는 데 대해 어떠한 근거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이런 점에서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다" 라고 벤은 말한다. 상식적인 구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벤이 질문하지 않은 그 어떤 것에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놓는다:

... 우리들은 인간의 이익을 존중하며, 그들이 합리적이 아니라고 해도, 합리성은 인간의 언어이므로 개들에게보다는 인간에게 우선권을 준다. 맹인으로부터 돈을 훔치는 것이, 단지 늘 있는 부정직한 행위가 아니라 부당한 행위인 것처럼, 합리성이 부족한 정신박약자의 결점을 이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가 개에게 이 점을 배려하지 않는 이유는, 개의 불합리성을 결점이나 장애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인과 정상적인 개를 구분 짓는 특성(합리성의 유무)은 우리들 자신이 편드는 바로 그 종의 이해관계와 능력, 즉 주장을 가진 다른 이들에 대해 명료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런 특성들이 인간과 다른 종의 구분점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상 구성원이 되기 위한 자격조건, 또는 도덕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는 계층의 판단기준은 아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 이것은, 인간이 다른 종의 구성원이 못되기 때문이며, 다른 종은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고, 이런 특성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논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벤은 정신박약자가 개보다 우월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양보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실 때문에 정신박약자가 개를 비롯한 "다른 종"의 일원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정신박약자를 개를 이용하듯 의학실험용으로 쓰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그 근거는 무엇인가? 정신박약자가 합리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문제가 풀렸다는 것이고, 같은 논리가 개에게는 적용된다?

그 어느 것도, 더 이상 그들의 정신적 수준과는 관계없다. 만약 공통의 결함을 이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면, 더 일반적인 한계(합리성 따위)를 이용하는 것은 어째서 정당한가? 이 논의에서는, 정신박약자가 인류의 일원이므로 그들의 이익을 더 배려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 외에 다른 뭔가가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다음의 정신적 체험을 제시하고자 한다. 서로 다른 두 인종, 예컨대 백인과 흑인 사이에 평균적인, 또는 정상적인 지능지수의 차이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때, 벤의 글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백인"으로, 모든 "개"를 "흑인"이란 말로 바꿔보자.

그리고 "합리성"을 "높은 지능"으로, "정신박약자"를 백인의 정상적인 지능지수보다 떨어지는 "말 못하는 백인"으로 바꿔보자. 마지막으로, "종"을 "인종"으로 바꿔보자. 이제 그 글을 다시 읽어보자.

바뀐 글에서는 백인과 흑인간에 존재하는 특성상의 명백한 중복을 거스르지 않은 채 지능지수만을 근거로 했을 때, 백인과 흑인 사이에는 엄격하고도 예외 없는 차별의 방어벽이 구축되었다.

물론 다시 바뀐 글은 허무맹랑하지만, 이것이 단지 다른 말로 이야기를 꾸며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요점은, 벤은 원문에 특성상의 명백한 중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동물이 서로 다른 종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배려의 양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옹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원문에서 이 점을 옹호하지 않았더라면, 바뀐 글처럼 처음 읽을 때 언어도단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이 종차별주의자라는 것에 주로 기인한다.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최선의 생각을 가지고 편안함을 누리려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의 벤의 자세는 현존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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