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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어회(活魚膾)와 능지처사(凌遲處死)/김지수교수
동보연 2005-06-17 02:06:29



활어회(活魚膾)와 능지처사(凌遲處死) -- 寶積 金 池 洙 (전남대 법대교수)

食習維新!  

새 숲에 웬 바닷바람?

내가 대학 다닐 적만 해도 신림동(新林洞)은 서울의 한적한 변두리로서, 문자 그대로 풋풋한 새숲 내음이 나는 전원 풍경이었다. 그 뒤로 20여 해가 지나면서 그야말로 눈부시게 변모했건만, 그 동안 나는 그러한 환경의 변화에 매우 둔감하게 지내왔다.

그 사이 대만(臺灣)에 3년간 유학 다녀오고, 그 때 배워온 채식 실험에다 박사논문 집필에 몰두하느라 세상 물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가끔씩 운동 삼아 관악산에 다니는 걸 빼고는, 10년 가량 거의 칩거(蟄居)하다시피 했으니, 내 눈에 띄는 것은 고작 신림동 거리뿐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조용하고 평온하게만 느껴지던 신림동에 최근 몇 년 전에 갑자기 이상한 바닷바람이 불어닥쳤다. 남부순환도로가에 2-3층 짜리 대규모 가건물 같은 철골 구조가 올라서고 어느새 근사한 모습으로 단장하더니, 인천 부두가에나 있을 법한 ‘회집’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등산 갔다 귀가하는 길에 보면, 거의 언제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인파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갯바람과 비린내 속에서 보낸 인연으로 낯설지 않은 생선 음식 문화이련만, 채식 실험을 하기 시작한 뒤로는, 알게 모르게 마주치지 않고 싶고 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작년 3월 대학에 취직하여 이 곳 빛고을(光州)에 내려오면서, 내 생활에는 상당한 진통 어린 변화의 압박(stress)이 닥쳤다. 신임 교원 연수차 외박하는 일도 큰 고통이었거니와, 마지막날 회식 장소인 무슨 생선회집은, 들어가기조차 몹시 싫고도 힘든 수난 그 자체였다.

취직 자체를 하나의 실험으로 여기고 받아들인 터라, 남들한테는 희색 만면의 환영식이었을 통과의례조차 내게는 선택의 대가로 치러야 할 불가피한 십자가일 수밖에 없었다

. 직장 선배님들한테는 술 안 마시고 채식한다는 내 기본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양해를 구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열리는 회식은 아예 참석하지 않기는 좀 뭐해서, 일단 같이 따라가서 내 본분만 스스로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웬놈의 고기집과 생선집은 그리도 많은지? 작년 한해 동안 글쎄 스무 번 가량 내키지 않은 나들이를 했을까?

활어회(活魚膾)의 현신설법(現身說法)

마침내 결단의 인연이 다가왔다. 취직한 지 꼭 1년쯤 되던 지난 2월말, 그 날도 직장 회의 뒤끝으로 가까운 생선회집에 갔다. 그 날도 나는 맨 끝 자리에 어정쩡하게 앉아, 남들 먹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지못해 바라보아야(觀照)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 보지 말아야 할 잔인하고 참혹한 진풍경을 차마 눈뜨고 보고 말았다.

무슨 물고기인지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상당히 크면서 좀 넓적한 (도미나 넙치류?) 생선회를 떠 왔는데, 회집에서 펄펄 살아 있는 생선임을 실물로 증명하기 위해서, 양쪽으로 회를 뜨고 남은 생선의 뼈대를, 즉 감지도 껌벅이지도 못하는 물고기 특유의 동그란 눈을 부릅뜬 채 머리와 꼬리 및 등배 지느러미, 그리고 앙상한 가시만 남은 척추뼈대의 몸통을 넓은 접시에 받쳐 깔고, 그 위에 회를 가지런히 담아 내 온 것이었다. 진짜 이런 ‘활어회(活魚膾)’는 처음이었다.

내가 눈이 나쁜데도 안경을 잘 안 쓰는 까닭은, 바깥 사물을 유심히 자세하게 관찰하고 싶지 않은 소망 탓이기도 하다. 헌데 이 날은 내가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보고 싶어한 것도 아닌데 진짜 활어회의 모습이 접시 통째로〔全盤〕 한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얼마나 예리한 칼날에 도대체 몇 번에 걸쳐 섬뜩섬뜩 온 몸의 살이 도려져 나갔을지 모를 생선이, 글쎄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알몸이 된 겨울나무처럼 이랄까,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산 해골 모습으로 아가미를 벌름벌름 거리며, 눈물도 못 흘리며 원한(怨恨)의 읍소(泣訴)를 하는지 체념(諦念)의 탄식(歎息)을 하는지, 여하튼 온 몸을 나투어 마지막 생명의 빛으로 뭔가 진리를 설파(說破)하는 것만 같았다.

‘현신설법(現身說法)’이란 말이 이토록 생생하고 절실하게 체현된 적은 여태껏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끓는 탕 속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접시채 들려 나갔다.

나는 내심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처했다.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쳐나오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도록 잡아끄는 이상하고 미묘한 힘을 느꼈다.

선배 어른들의 즐거운 향연(香宴)의 분위기를 깰 수 없다는 세속의 인사예절도 알게 모르게 상당히 의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아니 그 이상의 어떤 무의식적인 정신(精神)과 심기(心氣)가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물고기가 전생(前生)에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왜 금생(今生)에 그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자신을 도마 위에 접시 위에 희생으로 바쳐 나를 사로잡았을까?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진리를 설하기 위해서?

나는 그 소식(消息)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분명히 모르지만, 그 때 그 접시 위에서 벌어진 사실과 모습을 그대로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그 자리에서 확실해졌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뼈저린 회한(悔恨)의 추억(追憶)

나는 이제 생선집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제목의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내가 어렸을 적 자란 바닷가 경험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참회(懺悔)와 사죄(謝罪)의 마음이 간절해졌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 내 고향은 위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황금 조기들이 펄떡 펄떡 산 채로 경매되는 활기찬 항구였고, 선친(先親)께서 그 부두노동조합장을 하시는 동안, 우리 집은 그런 산 생선을 곧잘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런 생선 맛이 아마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 때는 복이었을지 모르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커다란 죄업(罪業)만 지었음에 틀림없다.

어린 나도 가끔 어판장에 나가 그렇게 펄펄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며, 박대나 쥐치 껍질을 벗기고 갈치 창자를 도려내는 모습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도 보았다.

그리고 특히 마음에 걸리는 죄악은, 내가 손수 닭 모가지도 죄어 죽여 잡아보고, 아마도 대학 초년쯤일까, 조그만 배를 타고 고향 앞바다에 나가 처음이자 끝으로 줄 낚시질을 하여, 잡혀 올라온 망둥이를 그 자리에서 산채로 토막내어 초장 찍어 먹었던 일이다.

아무리 참회하고 사죄해도 지워지지 않는 죄업의 기억이다. 철 없던 시절, 생명의 존엄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중생심(衆生心)의 과오(過誤)지만, 되돌이킬 수 없는 회한(悔恨)으로 뼈저리게 되살아 나는 것이다.

여하튼 지난 2월말 목도(目睹)한 활어회는 나한테 깊은 상념(想念)과 참회(懺悔)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고, 법제사(法制史) 전공에 걸맞게 ‘능지처사(凌遲處死)’의 비유를 영감(靈感)으로 내려주었다.

그렇다! 수십 번씩 섬뜩한 칼날에 그 연약한 살이 얇게 썰려 나가면서 극도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외마디 비명(悲鳴)이나 신음(呻吟)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아니, 그 비명과 신음 소리가 너무 작아서 16Hz도 못되거나 아니면 너무 커서 2만Hz를 넘는 까닭에 우리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 것뿐이리라!)

마지막 생명의 숨결을 벌름벌름 거리다가 마침내 끓는 탕(火湯) 속에 들어가 숨이 끊어지는 그 활어회는, 분명히 옛날 우리 조상들이 시행한 적이 있던 잔인하고 참혹한 ‘능지처사’의 형벌과 너무도 똑같이 닮아 있다!(생선회를 뜻하는 일본어 ‘사시미(さしみ)’는 한자(漢字)로 몸을 찌른다는 뜻의 ‘刺身(자신)’이라고 한다.)

활인회(活人膾) 능지처사(陵遲處死)

송(宋)나라 륙유(陸游)가 오대(五代)의 난세에 보통 사형법(常法)의 특별형으로 비로소 시행된 능지(凌遲)를 묘사한 모습은, “살점을 다 발라냈는데도 숨은 아직 끊이지 않고 헐떡거리며, 간과 염통이 이어져 팔딱이고 보고 듣는 감각이 아직 남아 있어서(肌肉已盡, 而氣息未絶; 肝心聯絡, 而視聽猶存.)” 보는 사람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고 천지자연의 조화를 깨뜨리며 임금의 인정(仁政)을 크게 손상시키는 참혹한 것이었다.

또 조선시대 숙종(肅宗) 임금 때 발행된 중국어 교본인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는 ‘나모 기동에 고 가죽이’는(木樁上剮了) 형벌 집행을 부연 설명하기를, “사람 처형하는 장소에 큰 나무 기둥 하나를 세우고 죄인을 그 위에 묶은 뒤, 망나니(劊子)가 형 집행하는 칼(法刀)로 그 살을 저며 내어 개한테 먹으라고 주고 단지 그 뼈만 남겨두어 지극히 참혹스러웠다”고 묘사했다.

‘능지(凌遲)’란 ‘陵遲’로도 쓰이며, 본디 구릉처럼 기울기가 작은 완만한 경사를 뜻하는데, 사형 집행을 아주 더디게 하여 느리게 천천히 죽이는 형벌이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고로 눈 뜨고 보기는커녕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어려운 참혹한 형벌이 참으로 많지만, 능지처사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널리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까닭은, 물론 명청률(明淸律)에 기본형〔正刑〕으로 법정(法定)되어 가장 근래까지 공식 집행된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여러 차례 칼로 저미면서 긴 시간에 걸쳐 지극히 혹심한 고통을 받으며 아주 느리게 죽어가도록 만드는 잔인한 방법이 그 어느 형벌과도 견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전하는 바에 따르면, 명(明)나라 때에 반역죄인 류근(劉瑾)은 4,700 차례의 칼질에 죽었고, 명말에 정만(鄭鄤)은 3,600번의 칼질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도만과(千刀萬剮)’란 성어(成語)는 능지의 대명사로 통용될 정도였다.

명(明)나라 시내암(施耐庵)의 수호전(水滸傳)을 비롯해서 그 전후 시대에 걸친 많은 문학작품에서 이 성어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원․명․청(元明淸) 시대에 얼마나 잔혹한 능지처사가 자주 집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청(淸)나라 때는 칼질 횟수에 따라, 능지처사가 24刀․36刀․72刀․128刀의 네 등급으로 구분되었다고 전해진다.

24刀의 경우, 양 눈썹, 양 어깨쭉지, 양 젖가슴, 양 아랫팔뚝, 양 윗팔뚝, 양 허벅지, 양 장판지를 차례로 저미는데, 그 뒤 심장을 찌르고 목을 친 다음, 두 손, 두 팔, 두 발, 두 다리를 차례로 절단했다고 한다.

가장 간단하고 빠른 8刀의 경우에도, 양 눈썹, 양 어깨쭉지, 양 젖가슴을 차례로 도려낸 뒤, 심장을 찌르고 목을 쳤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몸서리쳐진다. 물론 당시에도 망나니한테 뇌물을 쓰면, 첫 칼에 심장을 찔러 목숨을 끊은 뒤 나머지 칼질을 하는 편법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에 목을 친다고 해서 ‘凌遲處斬’이라고도 불렀다.)

려태후(呂太后)의 잔인한 질투전(嫉妬戰)

그리고 송나라 때는 네 팔다리를 차례로 자른 뒤 목을 치는, 비교적 점잖은 능지처참(凌遲處斬)이 주로 행해진 모양인데, 이러한 능지처참은 비록 공식으로 명명된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한고조(漢高祖)의 아내 려태후(呂太后)가 (처음?) 자행한 사실이 역사에 전해진다.

흉노(匈奴)에 투항한 리릉(李陵)을 위해 변론한 죄로 투옥되어 사형 대신 거세(去勢: 宮刑․腐刑, 영구불임형) 당한 뒤 풀려난 사마천(司馬遷)이 중국 정사(正史)의 효시(嚆矢)가 된 명작 사기(史記)를 쓰면서, 한고조본기(漢高祖本紀) 뒤에 효혜제본기(孝惠帝本紀) 대신 쓴 려태후본기(呂太后本紀)의 앞머리에서, 고조의 조강지처(糟糠之妻)인 려태후와, 한왕(漢王)이 된 뒤 얻어 총애한 척희(戚姬) 사이에 벌어진 질투전의 시말을 대략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려태후가 낳은 효혜제(孝惠帝)는 사람됨이 어질고 물러 고조를 닮지 않고, 척희가 낳은 여의(如意)는 고조를 많이 닮아서, 고조가 항상 태자를 폐위시키고 여의를 대신 책봉하려 했다.

게다가 려태후는 나이가 들어 항상 본거지를 지키느라 고조를 가까이할 기회가 더욱 드물었고, 척희는 고조의 총애를 받아 늘 따라 다니며 밤낮 훌쩍거리며 자기 아들을 태자로 세워달라고 보챘다.

특히 여의가 조왕(趙王)에 봉해진 뒤에는 하마터면 태자에 책봉될 뻔한 기회가 여러 번이나 있었는데, 대신들의 간쟁과 류후(留侯:張良)의 책략(策略)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러다가 고조가 한왕(漢王)이 된 지 12년,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평정(平定)한 지 7년만에 세상을 뜨고, 려태후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효혜제(孝惠帝)에 즉위하자, 려태후는 곧바로 가장 원한을 품어왔던 척부인(戚夫人)과 그 아들 조왕(趙王)한테 손을 썼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할 때 려태후는 강인하고 억센 기질로 여러 대신을 제거하는 데 막강한 실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그런 려태후가 남편이 죽은 뒤 자신의 연적(戀敵)을 처치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으리라.

먼저 척부인을 별궁(別宮)에 감금하고 그 아들 조왕을 불렀다. 사신이 세 번이나 왕래했으나, 조왕의 승상 건평후(建平侯) 주창(周昌)은 려태후가 원한으로 조왕 모자(母子)를 함께 죽이려는 줄 알고 고조의 유명(遺命)을 내세워 사신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려태후는 노하여 다시 사신을 보내 먼저 조왕의 승상을 부르고, 그가 장안(長安)에 이르자 또다시 사신을 보내 조왕을 불러 조왕이 한참 오고 있었다.

그때 인자한 효혜제가 그 사실을 알고, 조왕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패상(覇上)까지 마중 나가, 함께 입궁(入宮)한 뒤 자신과 함께 거처하도록 했다. 그토록 황제가 이복동생을 감싸 안자, 려태후도 어떻게 죽일 틈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효혜제 원년(元年) 12월 어느 날, 황제가 새벽 일찍 활 쏘러 나가는데, 나이 어린 조왕은 함께 일찍 일어나지 못해 혼자 궁궐에 남았다. 조왕이 혼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려태후는 바로 이 때를 놓칠세라, 곧장 사람을 시켜 짐독(酖毒)을 마시게 했다. 날이 샐 무렵 효혜제가 돌아와 보니, 그 사이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런 다음 려태후는 척부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두 눈알을 빼낸 뒤, 두 귀를 불 태우고, 말 못하는 약을 먹여 측간(廁間:변소) 속에 집어 넣고는, ‘사람 돼지(人彘:인체)’라고 불렀다. (제주도에는 돼지를 변소 속에 집어 넣어 사람 똥 먹고 살게 한다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필자)

그리고는 며칠이 지나 효혜제한테 그 ‘사람 돼지’를 구경시켰다. 측간에서 기이한 광경을 본 효혜제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 ‘사람 돼지’가 자기 서모(庶母)인 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내 대성통곡을 한 뒤 곧바로 병이 들어 한해 남짓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자기 어머니 려태후한테 이렇게 여쭈었다. “이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신(臣)은 태후의 아들로서, 이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효혜제는 이때부터 매일 먹고 마시는 향락에 빠져, 더 이상 정치를 돌보지 않고 폐인(廢人) 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7년 8월 가을에 마침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도대체 무슨 인연(因緣)일까?

작년 가을 처음 원문으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잠시 동안 말과 생각을 함께 몽땅 잃어버렸다. 전제 권력에 의해 불알 까인 사마천이 당대 최고의 권력을 둘러싼 질투전의 결말을 너무도 여실하게 생생히 그려 놓은 모습을 보면서, 잠시 뒤에는 온갖 착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더 이상 무슨 해석이나 논평이 필요하겠는가? 사실(史實)의 기록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태사공(太史公)의 2천여년 전 마음은 각자의 마음으로 사기(史記)를 통해 직접 느끼고 전해 받는 수밖에!

지난 2월말 처음으로 ‘활어회’를 본 뒤 ‘능지처사’를 떠올리면서, 려태후의 잔인무도한 질투전 승리 장면이 저절로 함께 연상되었다. 려태후와 척희부인은 전생에 무슨 악연(惡緣)이 있었길래, 2200년전 그토록 참혹한 질투전을 역사 속에 남겼을까?

그리고 지금 지구상 도처에 있는 회집의 주방장들은 그 많은 물고기들과 또 전생에 어떠한 원한관계가 있었길래, 매일같이 잔인한 능지처사를 아주 태연자약하게 자부심까지 느끼며 즐겨 자행할까?

설마 그렇게 많은 물고기들이 수없이 오랜 과거 전생을 거치면서 사형장의 망나니로서 지금의 주방장들을 능지처사로 죽였던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활어회를 진미별식(珍味別食)으로 즐겨 먹은 우리 일반 사람들은?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 회자(膾炙)의 진설(陳設) 위치에 관한 언급이 나오고, 맹자(孟子)도 회자가 양고기(羊棗)보다 훨씬 훌륭하다(맛있다)고 인정한 걸 보면, 회자는 정말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즐겨 먹은 게 틀림없다.

어쩌면 어로(漁撈)와 수렵(狩獵)이 시작되고 불과 칼이 등장하면서부터 비롯된 유구한 음식문화의 전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그와 함께 인간은 다른 동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남의 생산물, 남의 땅, 남의 여자, 남의 노동력을 약탈하여 독점하려고.

인간 사랑은 동물 학대(虐待)?

공자님과 예수님과 묵자님은 궁극에 모든 사람을 내 가족, 아니 나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라고 인애(仁愛)와 박애(博愛)와 겸애(兼愛)를 설파하셨다. 그 사랑만 행할 수 있어도 분명코 이 세상은 지상 천국이요 지상 낙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왜 그런 숭고한 보편적 인류애를 참되게 실현할 수 없을까? 우리 인간만 위한다면 다른 동물을 마음대로 부리고 죽이고 잡아먹어도 된다(좋다)는, 배타적 인본주의(exclusive humanism)와 편협한 인간이기주의 때문은 아닐까?

인간을 위해 자연을 정복하고 환경을 파괴해도 괜찮다는 인간 중심의 물질문명과 개발 논리의 결과가 과연 지금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라!

자연과 우주 자체도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고, 우리 인간은 다른 만물과 마찬가지로 각자가 그 커다란 우주 생명체의 조그만 한 세포일 수 있다는 성현들의 일깨움이 더욱 절실하게 공감되는 때가 아닌가? 하물며, 우리 인간과 비슷하게 살아 움직이며 희노애락의 감정과 사고판단의 지각을 지닌 동물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인류 평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생 평등을 설파(說破)하셨으리라. 그리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영혼의 한 분으로 추앙 받는 마하트마 간디님도 그의 ‘진리 실험 이야기’인 자서전에서, “우리 목숨을 지켜 가는 방법에도 어느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생명 자체를 위해서조차도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라고 역설하면서, 한평생 외골수로 우유조차 마시지 않는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집요하게 관철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 인간들은, 배고픔과 질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순간 입맛을 즐기기 위한 식도락(食道樂)으로나 음탕한 정욕을 좀더 자주 강렬히 부리려는 강장제로서, 거의 모든 동물과 미물들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고 있다.

살생(殺生)과 육식(肉食)의 인과응보(因果應報)

그렇게 죽어 가는 숱한 동물들의 원한(怨恨)과 독기(毒氣)가 얼마나 끔찍하고 참혹한 보복과 재앙으로 우리 인류를 언제 어떻게 얼마만큼 되덮칠 것인가? 자연을 정벌하고 환경을 파괴한 보복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이 복수심으로 내뿜을 원한과 독기는 제쳐놓고라도, 우리 인간 자신이 그 동물들을 잡아죽일 때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품게 되는 살기(殺氣)는 또 얼마나 잔인하고 참혹한가?

그 나쁜 기운이 사람 마음에 반복해 쌓이고 물들면, 인간 서로에게 언제 어떻게든지 알게 모르게 방출되고 폭발하지 않을 리 없으리라. 그런 원한과 독기와 살기가 쌓이고 뭉쳐 폭발하는 게, 폭행․살인 같은 크고 작은 범죄들이고, 더 나아가서 나라간의 전쟁도 결국 그 연장선상에서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공자님의 수제자인 안회(顔回)가 어느날 거문고를 아주 조화(調和:harmony)롭게 타고 있었는데, 마침 뜰 아래 쥐 한 마리가 퍼뜩 지나가며 그 뒤를 바짝 고양이가 쫓아가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평소 그토록 마음이 평정하고 조화롭던 안회한테, 어째 그때사 말고 한 순간 ‘아, 저 고양이가 쥐를 놓치지 말아야 할 텐테!’하는 잡념망상이 들었던가 보더라.

그 미세한 살기(殺氣)가 마음에 여리게 일었다 스러지는 그 찰나에, 안회가 타던 거문고 선율(旋律)도 그만 평온과 조화를 잃고 미세하게 간섭파(소음)를 내었던 모양이다. 멀리서 안회의 거문고 소리를 듣던 공자님이 그 기미(機微)를 곧장 알아채고서, 연주가 다 끝난 뒤 안회를 불러 그 연유(緣由)를 묻자, 안회가 자초지종을 이실직고(以實直告)했다는 고사이다.

또 맹자(孟子)는 사람의 직업 선택과 환경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무당은 미신일지라도 사람을 살리려고 축원하기에 마음이 날로 어질어지고, 반면 장의사는 과학일지라도 자신의 생계 수입을 위해 알게 모르게 남 죽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들기에 갈수록 어질지 못해진다는 비유를 대비한다. 물론 화살 만드는 사람과 방패 만드는 사람도 비슷하다.

둘은 본디 천성이 다 착하겠지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 화살이 어떠한 방패와 갑옷도 뚫고 맞히는 족족 사람을 쓰러뜨리길 염원하며, 방패 만드는 사람은 어떠한 화살이나 창이 날아와도 철통 같이 막아내길 염원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仁과 不仁의 차이가 커진다는 것이다. 호리지차(毫釐之差)가 천리지차(千里之差)로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는가는 우리의 심성과 기질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또 같은 음식이라도 그 요리 방법에 따라 그 잔인함과 참혹함의 정도도 역시 심성과 기질에 적지 않은 감염(感染)을 알게 모르게 끼칠 것이 틀림없다.

고기를 적게 먹고 살생을 줄이는 것은, 개개인의 인격 도야와 심성 수양에 막대한 선익(善益)일 뿐만 아니라, 장래 인류 사회의 죄악과 형벌과 전쟁 살륙을 줄이는 확실한 길이라고 믿는다.

사실 순전히 생물과학적으로 보더라도, 가축 고기(肉類)는 물론 생선, 이른바 활어(회)라는 것도, 알고 보면 대부분 대규모 사육이나 양식을 통해 생산되기 때문에, 예전의 자연산처럼 그렇게 건강하고 위생적인 품질이 결코 못되며, 따라서 우리 육신의 건강에도 득(得)보다는 실(失)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인공 사료와 화학 약품으로 인한 오염이 얼마나 심각한가? 요 근래 들어 남해안과 동해안 가두리 양식장에 걸핏하면 대규모 유해 적조(赤藻) 확산으로 말미암아 수만 마리 물고기가 떼죽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자명하다.

인간이 돈 많이 벌려고 탐욕 부려, 과밀 상태로 물고기를 인공 사료로 양식하면서, 유기물질 과잉으로 산소가 부족해지고, 게다가 적조까지 무성히 번져 폐사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폐사할 운명의 병든 양식어들이 운 좋게 조금 일찍 건져 올려져 수족관을 통해 산소 공급 받으며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방금전 도마 위에 올라가 지금 내 앞에 그럴듯한 ‘활어회’로 바쳐졌다고 생각해 보라!

아니면 언제 어떻게 죽었을지 모를 물고기가 썩기 시작한 시체로 냉장 또는 냉동 보관을 거쳐 회나 탕 또는 찌개로 둔갑했다고 생각해 보라! 내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토록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물고기(회)를 즐겨 먹을 하등의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산 낙지와 히딩크

활어회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는 전형적인 예로 ‘산 낙지’가 있다. 마치 남성다운 야성미나 용기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한 ‘산 낙지회’는, 실은 지극히 잔인무도한 야만성의 발로(發露)이리라. 생명의 기운이 펄펄 넘치는 여덟 다리(八肢)는 칼로 싹둑싹둑 잘라도 여전히 생기 넘치게 꿈틀거린다.

온몸의 살점을 샅샅이 회친 뒤에도 활어의 아가미가 벌름벌름 거리듯, 온몸의 근육을 뼈만 남기고 저민 다음에도 능지처사형을 당하던 죄수의 염통은 아직도 폴딱폴딱 고동치듯이…. 아! 자연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렬한가?!

그런 산 낙지의 다리 토막을 초장에 찍어 입 속에 넣고 오물오물(汚物汚物) 씹어 먹는 것을, 흡사 개선장군의 승전 나팔이라도 부는 듯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는 모습들은, 신성(神性)은 죄다 어디로 온데 간데 없고 동물성(動物性)만, 그것도 다른 약한 짐승을 사냥하여 피비린내 나게 씹어 먹는 흉포한 맹수성(猛獸性)만 악마처럼 활개치는 야만인의 얼굴로나 보일 것 같다.

지난 월드컵 경기 직전에 대한축구협회인지 그 주변 관련단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축구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히딩크 감독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선전을 기원하는 자리를 마련했던 모양인데, 거기서 바로 이 ‘산 낙지회’가 등장하여 우리측 사람(들)이 히딩크 감독과 코치 일행한테 먹어 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점잖은(?) 유럽 신사들은 이 난처한 위기 상황을 나름대로 재치 있게 모면한 듯하다. 한 코치가 우리 한국 대표팀이 ‘8강’인지 ‘4강’인지 올라가면 그때 가서 먹겠다는 답변으로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히딩크 감독은 과연 ‘명장’(?)답게 “사나이 대장부가 고작 4강(8강)이냐? 적어도 우승하면 먹겠다고는 해야지?”(라디오를 통해 번역 소개한 내용인데, 들은 지 꽤 지나 정확한 표현은 기억할 수 없고, 대강 대화의 핵심 줄거리만 간추린 것임.)

그 당시 이 일화를 전한 사람(아마도 스포츠 기자?)의 말투는, 다분히 ‘역시 히딩크다운 뱃장(뚝심)이다’는 어감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대화 내용을 전해 들으면서, ‘이런 야만적이고 무례한 대접이 어디 있는가?’ 라는 수치심이 들면서, 우리 나라가 적어도 우승까지 하기는 정말 어렵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히딩크 감독이나 코치나 ‘산 낙지’는 결코 먹고 싶지 않고 또 절대(?) 먹지 않겠다는 의사가 분명해 보이며, 그 의사에 반하여 ‘산 낙지’를 먹도록 강요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아주 높은 수준의 조건을 내세운 것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감독은 코치보다 한국 팀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포부(의욕)가 두어 단계 높았고, 또 우리나라가 선전(善戰)한 결과 감독이 코치보다 선견지명의 지혜가 앞선 것으로 판명났을 따름이다.

극악무도한 죄인을 가장 잔인무도하게 처형하는 방법으로 택한 능지처사를 집행하면서, 죄악에 대한 증오(憎惡)를 한층 더 강력히 과시하기 위해서, 칼로 저며낸 죄수의 살을 개한테 먹으라고 던져 주었다는데, 죄 없는 산 낙지의 팔다리를 잔인무도하게 싹둑싹둑 잘라 코쟁이 양놈(양키)한테 ‘반미(反美)’ 감정의 분풀이로나 던져주었다면 또 혹시 모르지만(물론 그래서도 절대 안되겠지만), 중대한 결전(決戰)을 앞둔 ‘국빈(國賓)’급 사령탑한테 축원의 의미로 권했다니, 이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무식(無識)이 용감(勇敢)’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인 감독과 코치가 요령껏 사양하고 더 이상 권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지, 만약 우리측에서 강권했거나, 외국인 감독과 코치가 우리 인심과 인정(人情)을 이해하고 또 체면상 존중해서 그 ‘산 낙지’를 먹었더라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4강’은커녕 ‘16강’ 진출도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칼로 잘리고 이에 씹힌 산 낙지의 꿈틀거리던 다리 토막들이 우리 대표팀 감독과 선수들의 축구판을 온통 흐물흐물 휘저어 보복하지 않았을까?

서양 속담에 “기호(嗜好)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취미에는 이유가 따로 없다.)(There is no accounting for tastes.)”는 말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情)이 많고 사랑이 많은 건 좋으나, 남한테 술이나 노래를 강권하는 따위의 풍습은 이제 개선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낙지 다리처럼 두 동강이 난 뒤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산 지렁이도, 사람들은 낙지처럼 초장 찍어 먹을 비위가 과연 있을까?


〈주요 참고문헌〉

禮記
孟子
史記 (司馬遷)
中華法苑四千年(倪正茂․兪榮根․鄭秦․曹培), 群衆出版社, 1987
한국의 전통사회와 법(박병호),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大漢和辭典(諸槁轍次)
辭海(縮印本,1979년판), 上海辭書出版社
渭南文集(條對狀), 陸游
朴通事諺解, 京城帝國大學法文學部(奎章閣叢書第八), 1933년 영인본
간디자서전, 함석헌 번역본, 三省出版社, 1979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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